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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5>

등록 2005-11-02 16:44수정 2005-11-02 16:44

먼하늘가까운바다 <45>
먼하늘가까운바다 <45>

눈물이 날 테니까, 많이 날 테니까 빗물인 줄 알게 가려주세요

공지영 45

“끝내자, 준고.”

내가 말했다.

준고는 마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실은 그가 내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랬을 것이다. 우리 지금은 힘든 시간이니까 조금만 이 고비를 넘겨보자고 말해주기를 기다렸을까?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서투른 동거와 이국 생활의 외로움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다정하게 홍, 이야기를 해봐, 하고 말한다 해도 나는 떼를 쓰듯 우겼을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갈래, 한국으로 갈래, 하고. 그때 나는 생이 우리에게 얼마나 냉정하게 모든 행위에 대해 해명과 책임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르는 스물둘이었다.

‘준고, 함께 한국에 가자. 가서 할아버지께, 일본 여자랑 결혼하려던 아빠를 반대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처럼 좋은 일본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하자. 우리 세대는 전과는 다르다고 말하자. 응?’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피곤함과 짜증이 섞인 그의 눈빛이 침묵 속에서 비수처럼 나를 찌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슬픈 얼굴이 내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날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너희들, 일본 사람들이라고 소리쳤을 때, 우리를 점령하고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 것을 빼앗아가고… 하는 소리를 했을 때 준고의 얼굴이 처음으로 천천히 나를 향했는데 그때 그의 눈빛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 보였다. 질려서 멍해진 그의 눈에 마지막 비수를 꽂듯이 나는 다시 소리쳤다.

“너희가 잘못은 했지만 우리는 오십 년이 넘도록 너희를 쫓아다니면서 사과해라, 사과해라 하고 있는 것도 너무 웃겨. 마치 너처럼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 너희 일본 사람들한테!”

준고가 입을 다물고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는 진공의 공간 속으로 잠시 사라져버린 듯했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우리는 이미 다른 차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제야 내게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라고 해도, 무심하다고 해도, 나는 한국의 여자였다. 나를 점령해버렸던 그 분노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결국은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으나 나 자신이 나 자신 하나만은 아니었다. 그와 나 자신 속에 우리가, 그의 조국 일본과 내 조국 한국의 긴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영국인 애인과 헤어질 때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그 말, 너희 일본 사람들…. 그건 종결되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며 마침내 화해하지도 못한 긴긴 역사의 그늘이었다. 그 그늘이 새처럼 커다란 날개를 펴고 결국 그와 나 사이에 둥지를 틀어버린 것이었다.

그후 오랫동안 생각해보았는데 평소에 나는 그런 생각을 그리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같으면, 웬 역사의식? 웬 애국심? 하고 웃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 나의 존재가 가장 예민했던 바로 그 순간에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그렇게 어이없는 종말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어주고 있었다. 참으로 비겁하고 훌륭한 명분이었다.

준고가 나가버린 집에서 나는 가방을 쌌다.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집어넣고 집을 나서려다가 현관에서 불현듯 뒤돌아보았다. 그의 눈길 안에 있던 모든 사물이 가지 마, 라고 말하는 듯했다. 불을 끄려는데 어둠 속에서 아직도 켜놓은 커피메이커의 빨간빛이 보였다. 나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그것을 껐다. 그러자 완벽하고 조용한 어둠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열린 창문으로 파도 소리처럼 밀려들었다. 호숫가의 물소리도 귓전으로 다가설 것만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넣고 먹던 푸른색 등나무 바구니가 보였다.

준고랑 자주 가던 카페 안나의 주인 부부 얼굴과 프로방스 빵집 마리코의 친절한 웃음, 꼬치구이 집에서 풍겨 나오던 그 냄새가 떠올랐다. 일본에 오지 않았더라면 막연하게 그저 한 덩어리로 보였을 일본이라는 나라가 구체적인 사람들의 모습으로 떠오르자, 내가 실은 예의 바르고 깨끗하며 부지런한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말하고는 조금 다른, 아주 감각적인 일본어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알아보았던 이유는, 일본이라는 남의 나라에서 만년의 빙하처럼 떠도는 듯한 내 모습을 일본인인 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너무나 사랑했다는 것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는 것도, 하필이면 떠나는 순간에 알게 되었다.

준고의 책상 위에 내가 준 휘파람 부는 소년이 두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얼굴이었고 일본인의 얼굴이기도 했다. 너무도 닮았기에 서로를 미워해야만 했던 비운의 형제들처럼 나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준고의 책상으로 가서 소년 인형을 집어들고 물었다.

“너도 갈래? 한국으로?”

소년 인형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웃고 있었다.

“남아 있을래? 맨발을 벗고 다녀도 될 만큼 깨끗한 골목이 있는 이 나라,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말도 조용조용하게 하고 거리마다 화분이 있고 꽃들이 피어나는 나라, 음식이 달고 부드러운 이 나라에? 이 나라에 사는 우리 준고 옆에? 나는 갈래. 고향으로 가고 싶어. 여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거기가 좋아서. 큰 소리로 싸움도 잘하고, 큰 소리로 화해도 잘하고, 큰 소리로 웃기도 잘하고, 큰 소리로 울기도 잘하는, 모두가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는 내 나라로 가고 싶어. 물어보지 않아도 김치를 더 주고, 노란 무도 더 주고, 배고프다고 하면 밥도 한 그릇 더 주는 내 나라로 가고 싶어. 거기는 모두가 우리니까. 그리고 나는 별로 조용조용한 사람이 아니거든.”

소년 인형은 한때 베니가 그랬듯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너무 많은 걸 바랐나봐. 감히 영원 같은 걸 갖고 싶었나봐. 변하지 않는 거 말이야. 단단하고 중심이 잡혀 있고, 반짝반짝 빛나고 한참 있다 돌아와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두 팔을 벌려주는 그런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같은 거. 꿈꾸지 말아야 할 것을 꿈꾸고 말았나봐. 내가 너희 주인한테 물어봤는데…, 처음 만나 너를 주고 나서 물었거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어? 하고. 어딘가에 그런 게 있다고 그 사람이 대답했어. 어딘가라고 말했는데 그게 그 사람 속에 있는 줄 알았던 거야….”

나는 무거운 가방 두 개를 들고 그 집을 빠져나왔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머리칼을 조금씩 적시고 있었다. 호수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잘 있어. 벚나무들, 청둥 오리들, 준고랑 처음 만났던 다리도. 카페 안나의 아저씨랑 아줌마, 프로방스 빵집 마리코도 안녕…,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웠어요.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일본 사람들을 싫어했을 거니까.’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사각거렸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나는 기도를 했다.

‘비가 오게 해주세요. 가방이 두 개라 우산을 못 들어요. 너무 무거워서 한 손으로 다 잡을 수도 없어요. 그런데 눈물이 날 테니까, 많이 날 테니까 가려주세요. 빗물인 줄 알게 가려주세요.’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그 다음 날도 내렸다. 나는 그렇게 일본을 떠났다.


"…축하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쓰지 히토나리 45

하루 종일 신문사 취재에 응하면서도 나는 줄곧 내일 귀국을 앞두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오늘 저녁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셋이서 식사라도 하시겠어요?”

마지막 취재가 끝나자 이연희 씨가 물었다. 셋이라는 건 통역해준 여성을 포함해서다.

“그러고 싶지만 일이 좀 있어서 오늘은 사양하겠습니다. 식사는 룸 서비스로 간단히 하지요”

이연희 씨가

“알았습니다. 그럼 내일 세 시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통역을 해준 여성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내일 세 시면 호텔을 떠나야 한다. 남은 시간 동안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절망적인 마음으로 방으로 올라갔다. 창을 열자 저녁놀에 물든 남산의 웅장한 모습이 나를 압도한다. 분주하고도 기적 같았던 이 닷새 동안을 되돌아보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와인을 꺼내 마신다. 공복인 탓에 금방 알코올 기운이 올라온다. 성급한 별이 서울타워 위에서 깜박이고 있다. 그 별을 홍이인 양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잔을 비워간다.

밖으로 나갈 마음이 내키지 않아 룸 서비스로 일본 음식을 주문해 텔레비전을 보며 먹는다. 세계 각지에서 전달되는 뉴스를 물끄러미 바라본 뒤 목욕을 한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닷새간의 피로를 푼다. 무엇을 해도 머릿속에서 홍이가 떠나질 않는다.

목욕 가운을 걸치고 남은 와인을 마시며 어두워진 남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프런트 직원이 최홍이란 분께 온 전화입니다, 연결해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수화기 저편에서 홍이의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준고….”

그 다음에 들려오는 건 숨결뿐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고쳐 쥐고 홍이의 용기를 붙들기 위해

“전화해 줘서 고마워.”

하고 가능한 부드럽게 말했다.

홍이가 응, 하고 대답했다.

“내일 돌아가지? 배웅은 못할 것 같아 전화로 인사하려고….”

“내일, 아니 지금이라도 만날 수 없을까?”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나는 단어를 골라가며 묻는다. 홍이는 잠시 망설이다, 아니, 미안해, 하고 거절한다.

“홍, 난 꼭 해두고 싶은 말이 있어. 네가 많이 오해를 하고 있어. 고바야시 칸나도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야. 내가 그녀를 부른 게 아니라 담당 편집자 자격으로 칸나가 마음대로 쫓아온 거야. 그래, 지금 칸나는 내 담당 편집자야.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를 낸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지. 하나하나 제대로 오해를 풀고 싶어. 지난 일들에 대해서는 특히 시간을 가지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그녀를 붙들려고 했다. 안타깝고 초조했다. 애가 탔지만 전화로는 홍이의 표정을 알 수가 없다. 어떤 마음으로 전화를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탁이야. 내일 회사에 가기 전에 조금만이라도 시간을 낼 순 없겠니?”

“내일…, 난 회사를 쉬어. 집에서 할 일도 있고 오후엔 사귀는 사람과 만나기로 되어 있고….”

“사인회장에 왔던 사람이구나. 네게 청혼을 한다고 했지….”

희미하지만 홍이가 토해내는 한숨이 거칠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뭔가 고민을 하는 것 같다. 나는 필사적으로 수화기에 귀를 대고 조금이라도 그 뒤에 감추어진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홍이가 침묵을 깼다. 나는 엉겁결에 뭐라고? 하고 되묻고 만다.

“청혼을 받아들인다고?”

“그래.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한숨도 탄식도 오열도 아닌, 그것들이 한데 얽히고설킨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주위는 절망으로 채워졌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기적적인 재회는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끝내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감정의 줄이 끊어지자 나는 어둠 속을 떠돈다.

“…축하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칸나에게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질투나 원한 같은 건 잊어버리고 상대가 행복하기를 빌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미움이나 분쟁은 사라질 거야.”

이번에는 내가 홍이를 축복할 차례였다. 분명히 세상은 그렇게 평화로워져야 했다.

“고마워. 조심해서 가.”

“그래, 그럴게. 홍, 행복해라.”

말문이 막혔다. 칸나처럼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 수가 없다. 당장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나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울 것 같다. 눈물이 제멋대로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숨을 멈추고 감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참는다.

“꼭 행복해야 된다.”

말을 끝내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산을 돌아보며 아무 주저 없이 울었다.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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