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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6>

등록 2005-11-09 20:09수정 2005-11-10 09:54


지금 헤어진대도, 다시는 못 만남대도 그와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공지영 46

회의를 끝내고 서둘러 필자가 사는 일산까지 갔다가 돌아오니 민준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나우 리그렛님, 포에버 리그렛 하기 전에 약속을 정하심이 어떠신지…. 오늘 저녁에 소생은 시간이 많사옵니다. 저녁 전이라도 부르시면 달려가겠사옵니다. 장담하건대 퀵서비스보다 빠르고 메일보다는 좀 늦게 달려가겠사옵니다. 이 몸은 인간이기에 선처를….


나는 웃었다. 민준은 언제나 같은 말이라도 재미있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출판사로 쓰고 있지만 우리 집이었던 이 집 담 밑에서 열다섯 살 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그 아이에게 나는 최홍이고 하얀 장미를 좋아해, 하는 말을 했다는 걸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나보다 한 뼘은 크지만 그때 그는 나보다 조금 작았었다. 처음 만났을 때 수줍어서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던 그의 모습도 떠올랐다.

“어떻게 생겼어? 옆집에 미국에서 왔다는 이 변호사님 손자 말이야.”

록이가 물었다.

“적당하게 생겼어. 눈도 적당히 크고 코도 적당히 높고 입도 적당히 얇고 몸도 적당히 말랐어. 한 마디로 ‘적당’이야!”

우리는 그 후로 민준을 적당이라고 불렀다. 민준은 그 별명을 몹시 싫어했다. 그와의 지난 세월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상처 입히지만 않았다면 좋았겠으나, 그것은 그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준고의 잘못도 아니었다.

답신을 보내려고 하는데 나우 리그렛이라는 아이디가 갑자기 마음에 걸렸다. 지희 생각이 났다. 우리가 서른이 되기 전에, 눈물을 그치고 떠나야 하는 진짜 아프리카는 어디일까. 나는 아이디를 변경했다. 진짜 아프리카. 쓰고 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검토해야 할 원고가 있어. 청혼 받느라고 하도 정신 없어서 일에 게을러졌거든. 집에서 저녁 먹고 호출을 기다려. 어차피 출판사 옆집이 너네 집이잖아. 문자 보낼게.

-진짜 아프리카를 발견하러 몸을 바꾼 나우 리그렛

그때 출판사가 떠들썩해지며 이연희 과장이 들어섰다.

“사사에 선생은?”

누군가 물었다.

“저녁 먹자니까 그냥 호텔 방에서 쉬고 싶대. 피곤한 얼굴이라서 더 권하지도 못했어. 내일 세 시에 출발하니까.”

“저번에 회식 때 사사에 선생이 말했던 그 한국 여자 말이야. 끝내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죠?”

“글쎄, 그 여자 누군지 되게 좋겠어. 주인공도 되고. 남자들은 주인공이라면 무조건 좋아하잖아.”

“난 주인공 싫어. 너무 고생이야. 파란만장한데다가 대개는 헤어지잖아!”

웃음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나도 웃었다. 웃는데, 그날 예가에서 고개를 떨구고 오징어볶음을 먹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웃음소리가 왁자한 사무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이 집에서 나는 일본으로 떠났었다. 윤동주의 시집을 끼고 그의 발자취를 찾겠다고 떠났다.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적도 없다, 라고 쓰고 그 시대에 희생당한 맑은 눈의 사내.

원고를 펴고 기획안을 쓰고 있는데 문득 시간이 오래 흘렀음이 느껴졌다. 일곱 시가 훌쩍 넘어 여덟 시로 향해 가고 있었다. 원고에 몰두한 탓인지 자리가 다 비도록 퇴근 인사도 의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멍하게 시계에 시선을 던진 채 앉아 있었다. 그가 도착하던 그날 남산에 올라 차 안에서 반짝이는 저 시각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났다. 배가 좀 고팠지만 기다리고 있는 민준을 생각해서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나는 다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7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준고….”

생각보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뒤에 나 홍이야,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그가 나를 부르던 그 이름이 떠올랐던 것이다. 베니, 베니, 주홍빛 이름…. 내 망설임을 알았는지 그가 얼른, 전화해줘서 고마워, 했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말했다.

“내일 돌아가지? 배웅은 못할 거 같아. 전화로라도 인사하려고….”

“내일, 아니 지금이라도 만날 수 없을까?”

그가 물었다. 이렇게 전화로 인사하는 마당에 만나서 그를 배웅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준고 때문에 민준을 힘들게 하는 일은 그날 하루로 충분했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가고 나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그와의 이별이 진짜 마지막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헤어진대도, 다시는 못 만난대도 그와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게 무슨 뜻인데? 하고 누가 물으면 뭐라고 딱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럴 것 같았다.


그 사소한 만남 뒤에 두 나라를 걸친 운명적인 사랑과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쓰지 히토나리 46

그것은 새로운 아침의 시작인 동시에 지나간 시간의 종말이기도 했다. 커튼을 치지 않고 잔 탓에 나는 또다시 아침 햇살에 잠을 깼다. 어젯밤에는 얕은 잠을 자며 꿈과 현실 사이를 무수히 오가느라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반나절 동안 사용할 자동차를 부탁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망원경도 함께 부탁했다. 이대로 홍이를 만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얼굴을 마주보고 분명하게 내 마음을 전해야 한다. 더 이상의 주저함은 없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일본어가 능통한 지난번의 젊은 기사였다. 그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반나절을 같이 보낸 연대감이 만들어 낸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부탁합니다, 하고 말했다.

“오늘도 분당입니까?”

“네, 지난번 저수지로 부탁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사람을 기다릴 작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운전 기사는 대답을 하고 조용히 차를 출발시킨다.

난방이 잘된 차 안에서 얼어붙은 한강을 바라본다. 이 강에 살고 있는 용이 나와 홍이를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거대한 집적회로를 떠올리게 하는 도시였으며, 그 중심을 흐르는 한강은 이 나라를 움직이는 에너지의 동맥이었다. 태양 빛을 먹으며 성장하는 이 강의 주인인 용이야말로 이 현대적인 도시의 수호신이라 하겠다. 나는 한강의 용에게 손을 모은다. 신앙과는 인연이 먼 내가 손을 모아 상상 속의 용에게 빌고 있다. 눈꺼풀 위로 강물에 반사된 빛이 느껴진다. 용이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 눈을 뜨고 흐르는 강 끝을 응시한다. 눈부신 빛 저편에서 뒤척이는 용의 꼬리를 본 것만 같다.

“오늘도 몹시 춥습니다. 그 차림으론 역시 오래 못 계실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방한복을 사용하시지요.”

운전 기사가 말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오, 이번엔 얇은 옷차림이라도 괜찮습니다, 하고 말한다. 운전 기사가 잠깐 내 쪽을 돌아보고 어쩔 셈일까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차는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분당을 향해 달린다. 홍이와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홍이는 오늘 회사를 쉬고, 오후에는 사귀는 사람과 만난다고 했다. 호숫가를 달린다면 오전 중일 것이다. 비가 오는 날도 바람이 부는 날도 홍이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도 분명 달릴 것이다. 비록 홍이를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만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운전 기사의 상냥한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완전히 잎을 떨군 겨울 나무를 바라보며 예, 하고 끄덕인다.

“예전에 교제했던 여자입니다. 그렇지만 오해와 어렸던 탓에 헤어지고 말았지요. 칠 년이 지났습니다만 잊을 수가 없군요. 오늘 오후 비행기로 한국을 떠나는데 잠깐이라도 볼 수 있으면 해서요.”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 이야기를 운전기사에게 한다. 이 사람이라면 아무 말 없이 들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셨군요. 그럼 선생님 소설의 반은 실화로군요. 소설은 해피엔딩이었는데 거기에는 사사에 선생님의 희망이 그려진 거로군요.”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말을 잇지 못한다. 운전기사가 얼버무리듯 쓸데없는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한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걸요.”

나는 대답한다.

그대로 시선을 창밖으로 풀어놓는다. 언덕 위 잎을 떨군 나무들이 살갗을 내보이고 있다. 햇살이 가냘픈 것을 보니 창밖의 추위가 전해져 온다. 나는 아득한 날들을 되돌아본다.

나는 칸나와 헤어진 뒤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 이 학년 봄이었다.

막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아 만발한 벚꽃에 마음을 위로받으려고 이노가시라 공원 호숫가를 걸었다. 벚꽃이 호수 주변에 앞 다투어 피어 있었고, 벚꽃놀이를 나온 사람들로 공원은 북적거리고 있었다.

호수 가운데 놓인 나무다리에서 바라보는 벚꽃은 한층 각별했다. 나는 난간에 기대 다리를 뒤덮다시피 피어 있는 벚꽃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벚꽃 사이로 홍이가 나타났다. 흰옷을 입은 탓에 순간 꽃의 요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어쩐 일인지 처음부터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실연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도 홍이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생각지 못한 운명이 숨어 있었지만, 그때의 우리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마치 환상을 보듯 나는 가만히 홍이를 바라보았다.

달려오던 아이들이 그녀와 부딪혀 홍이가 들고 있던 닥종이 인형 한쪽인 휘파람 부는 소년 인형을 떨어뜨렸다. 인형이 굴러 내 발밑에서 멈추었다.

나는 인형을 주워 잠시 바라보고는 홍이에게 내밀었다.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벚꽃잎들이 둘 사이에서 조용히 춤추었다. 홍이의 시선이 어떤 예감과 함께 내 마음을 휘감았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평온한 시작이었으나, 그 사소한 만남 뒤에 두 나라를 걸친 운명적인 사랑과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의 기적이 둘을 만나게 한 것처럼 또 몇 번의 기적이 더해져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것이 신의 못된 장난인지, 아니면 예정된 운명인지 나는 지금 그것을 확인하려 한다.

빛이 차창을 흐른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멈출 수 있는 건 신뿐이다. 나는 운명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홍이가 살고 있는 분당에 도착했다.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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