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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8>

등록 2005-11-23 17:32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8>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8>
“안녕 민준아, 안녕 준고”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었다

공지영 48

차는 강변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분당에 가까이 올 때까지 그도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혼자 앉아 울고 있는 내 모습으로 민준은 모든 것을 이해한 듯했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나에 대해 논문을 쓴다면 아마 준고보다 그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많이 안다고 많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가면 언제 와?”

내가 물었다. 민준이 피식 웃었다.

“오 년쯤.”

“그럼 우리 서른네 살, 아님 다섯? 야아, 너 그때 배는 나오지 마. 나도 늘 뛰고 있을게. 그런데 아무리 뛰어도 나 아줌마처럼 되면 어떻게 하지? 아저씨, 아줌마가 만나서 ‘민준아, 홍아’ 그렇게 부르면 이상하지 않을까?”

나는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준이 웃었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지금부터라면 애 넷은 충분히 낳을 수 있는 시간이네. 게다가 두 명은 쌍둥이라며!”

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좀 너무했나 싶어서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힘겨운 침묵이 다시 차 안을 감쌌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니?”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미안해.”

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하다고?”

민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랑한다고 십오 년 동안이나 널 바라보기만 하면서 기다린 사람한테, 결혼을 약속하자는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자가 세상에 너말고 또 있을까?”

민준의 목소리가 그렇게 격앙된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또 그에게 야단을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늘 어른스러웠고 그래서 나는 늘 철부지 같았다.

“…민준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눈물이 어둠 속에서 반짝 하고 빛났다.

“너랑 먼저 연애라는 걸 했었다 해도, 아니 너랑 결혼했었다 해도 애가 넷이나 있었다 해도… 그 사람이 오면 나는 처음처럼 그렇게 가슴이 철렁할 거야. 누굴 먼저 만나고 누구와 먼저 연애하고 그런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

민준이 무슨 말인가 할 듯 할 듯하다가 혼자 고개를 저었다.

“최홍, 나는 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차는 어둠 속을 달려 호숫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검은 물 위에 멀리 보이는 불빛들이 반짝였다.

“그 사람 가고 너도 가겠지. 난 혼자 남게 될 거야. 하지만 혼자 남는 게 무서워서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속이는 건 싫었어.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 말하면 그건 전혀 거짓말이 아니고 심지어 진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너하고 결혼하겠다고 하면 그건 진심이 아니야. 그럼 나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지 않을 거 같았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아내를 둔 너는 또 자랑스럽지 않겠지. 이게 내가 네 사랑에 보답하는 최대한의 사랑이라는 걸, 네가 내 말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

민준은 미동도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나 내리고 싶어. 여기서부터 걸어갈래.”

내가 말했다. 민준이 잠시 망설이다가 차를 세웠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가 차를 돌려 가는 걸 보며 손을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걸었다. 서 있던 민준의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차를 돌려 집으로 가지 않고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헤드라이트를 끈 채로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멈추어 섰다. 그도 멈추어 섰다. 내가 다시 걸었다. 그러자 그도 다시 그만큼 따라왔다. 내 보폭을 맞추느라 잠시 서기도 했지만 그는 꼭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집 앞으로 도착해 나는 열쇠로 대문을 열었다. 그의 차가 그때까지 꼭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내 뒤에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나는 그의 차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단정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 채로 나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민준의 얼굴이 그 대문만큼 가려지다가 사라졌다. 대문에 등을 기댄 채로 서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히 말했다.

“안녕 민준아, 안녕 준고.”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었다.


지금은 함께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홍이와 함께 달려야 한다

쓰지 히토나리 48

캔 커피를 두 개째 마셨다. 운전 기사는 잠깐 잠이 든 건지 때로 그런 숨소리가 들려온다. 차를 이곳에 세운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다. 그 사이 호수 주변을 달리는 사람 몇몇이 내 시야를 지나갔다.

기분 전환을 위해 나는 차 밖으로 나간다. 목을 돌리고 기지개를 켠다. 운전 기사도 밖으로 나와 아직이네요, 하며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 그렇지만 이렇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합니다. 이 순간은 줄곧 그녀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운전 기사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저, 하며 먼 곳을 가리킨다. 뒤돌아보니 산책로 끝에 사람이 보였다. 그 모습은 작지만 낯익었다. 나는 서둘러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왔습니다….”

홍이가 바람을 가르며 경쾌하게 달려온다. 그녀의 발이 규칙적으로 땅을 차고 오를 때마다 내 감정도 격렬하게 흔들렸다.

망원경을 차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고 재킷을 벗어 티셔츠 차림이 된다. 아래는 청바지와 운동화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함께 달릴 겁니다.”

“네? 뭐라고요?”

“같이 달릴 겁니다. 지금부터.”

나는 대답을 남기고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 동안 홍이는 갈대밭을 지나쳤다. 나는 그녀를 뒤쫓지 않고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홍이와는 호수 반대편에서 마주칠 계산이었다. 예전에 홍이는 이노가시라 공원의 호숫가를 매일 몇 바퀴나 돌았다. 틀림없이 이 율동 공원 호숫가도 마찬가지로 몇 바퀴 달릴 것이다.

채 따뜻해지지 않은 몸을 성급하게 움직인 탓에 심장 주위가 아팠다. 홍이를 만나기 전에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나온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을 직시해야 한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나는 새로워진다.

칠 년 동안 홍이를 생각하며 달려 왔다. 몸은 준비가 되었다. 이제는 정신이 따라와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몸을 풀면서 조금씩 속도를 올려간다. 이 길의 끝에 홍이가 있다. 나를 발견하고 홍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햇살이 내가 달릴 길을 비춘다. 호수면이 눈부셔 눈을 가늘게 뜬다. 이 괴로움을 닦아 내기 위해 나는 지금 달리고 있다. 내 영혼과 정신은 오직 한 사람의 여자 최홍을 향하고 있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홍이와 가까워지고 있다.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은 말이 아니다. 말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함께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말은 그 다음 의미를 갖게 된다. 형식으로 속이거나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얼버무려서는 마음을 비끄러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칠 년 동안을 달려온 것이다. 홍이와 함께 달리고 싶다. 설령 더 이상의 미래가 없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일본에 돌아가기 전에 나는 홍이와 함께 달려야 한다.

끝까지 달렸을 때 나는 비로소 홍이에게 용서를 구하게 될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 이렇게 타이르며 호숫가를 달렸다. 커다랗게 커브를 돌아 곧게 뻗은 길에 들어서자 이윽고 앞에 사람이 보였다. 그 한 점을 똑바로 응시하며 계속 달린다. 홍이는 어디쯤에서 나를 알아볼까.

그날, 두 사람은 이노가시라 공원 나무다리 위에서 스쳐 지나갔다. 빛나는 햇살 속에서 우리는 운명을 주고받았다.

그날, 나와 홍이는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하나가 되었다. 마음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날, 우리는 우산을 받쳐 들고 빗속을 걸었다. 비가 세차게 내릴수록 나는 홍이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에서 키스를 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이별의 그림자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날,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날, 우리는 등을 돌리고 잤다.

그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뻗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으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날, 나는 나무 그늘에서 혼자 달리는 홍이를 지켜보았다.

그날, 나는 흐느껴 우는 홍이를 꼭 끌어안았다. 윤동주 시를 읽어 주는 홍이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홍이가 만든 이상한 음식을 남김없이 먹었다. 카페 안나의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우리는 언제까지고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날의 홍이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아직 내 안에 살고 있다.

나는 달리며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홍이는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좁혀져 간다. 과거가 현재로 밀려오듯, 그리고 미래로 더욱 확대되어 가듯.

마치 성화주자나 되는 양 나는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홍이가 얼굴을 들어 문득 나를 발견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신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놀란 홍이를 그대로 달려 지나간 다음 앞에서 유턴해 전속력을 다해 홍이 곁으로 달린다. 홍이는 속도를 조금 늦추어 내가 쫓아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홍이를 앞지르자, 당황한 홍이가 속도를 다시 올리며 뒤쫓아왔다. 홍이가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나는 홍이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홍이의 얼굴이 활짝 빛났다. 그것은 예전 그대로의 그리운 홍이의 웃음 띤 얼굴이었다. <끝>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한·일 합동소설 연재는 이번회로 끝납니다. 다음주 이 난에는 두 연재 작가 공지영씨와 쓰지 히토나리의 ‘연재 후기’가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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