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손불남초등학교에 들어선 민예학당
70년대 통기타 가수 은희씨
17년 준비 끝에 다목적 문화공간 마련
천연염색 작업실·전시장등 갖춰
17년 준비 끝에 다목적 문화공간 마련
천연염색 작업실·전시장등 갖춰
함평에 문연 민예학당
멀리 서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산남리 교촌마을 옛 손불남초등학교 교정. 황혼이 아름다운 저녁 7시 무렵 폐교 본관 자리에 세워진 2층짜리 건물에서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기타 반주에 실려 흘러나왔다.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그 오솔길/ 지금은 가버린 가슴아픈 추억…”
갈옷을 입은 초로의 여인이 눈을 지그시 감고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에서 70년대 초 ‘사랑해’ ‘꽃반지 끼고’ ‘연가’ 등으로 국민적인 연가 가수였던 흔적이 묻어났다. 지금은 갈옷 디자이너의 길을 걷고 있는 은희(김은희·55·왼쪽)씨가 4월29일 다목적 문화공간 민예학당의 문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갈옷 디자인 작업장과 문화 난장을 겸한 다목적 공간을 갖고 싶었어요. 17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서 지난 2003년에야 함평에서 마음에 드는 터를 발견해 이제 꿈을 이룰 수가 있었죠.”
전체 7천평 규모에 한국의 선을 살려 지은 건평 1000평 2층짜리 민예학당에는 다목적 홀과 워크숍실, 옷 전시장, 동양 최대 규모의 염색작업장과 디자인실 등을 갖췄다. 그와 민예학당 당주인 남편 김화성씨, 지인들이 몇해 동안 황토로 땅을 다지며 땀을 흘린 수고로움이 이날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는 “민예학당은 포크 가수들이 마음 편하게 노래할 수 있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시를 읊으며, 화가와 사진작가들이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개소식을 기념해 나라 안팎에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광주에서 온 사물놀이패들은 지신밟기로 민예학당의 성공을 기원했다. 그의 오랜 팬이었던 70년대 포크송 동호회 바람새 회원들은 즉석 콘서트를 마련해서 ‘사랑해’ ‘꽃반지 끼고’ ‘연가’ 등을 불러 옛 가수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은희씨는 이들을 위해 여전히 맑은 목소리로 ‘꿈길’과 ‘등대지기’를 선물했다.
“앞으로 민예학당은 우리 천연 염색을 보급하고 다량생산하는 기지가 될 것입니다. 감을 많이 사들여서 농촌 살림에도 보탬이 되고 갈옷을 외국에 수출해서 우리 색깔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일거양득이에요.”
남편 김화성 당주와 그의 제자들은 청소년들에게 방학 기간에 수벽치기와 태껸 등 전통무예도 가르칠 계획이다. 또 11월에는 젊은 여성들을 위해 된장체험, 김장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하면서, 차츰 농예와 도예, 공예를 가르치는 학당으로 꾸밀 예정이다.
1970년 ‘사랑해’로 데뷔한 뒤 3년간 ‘꽃반지 끼고’ ‘등대지기’ 등 히트곡과 30여장 앨범을 발표하며 인기를 누렸던 그는 74년 홀연히 가요계를 떠났다. 결혼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뉴욕주립대학에서 패션과 디자인을 배운 뒤 85년 귀국해 압구정동에 코디네이션 센터를 세웠다.
“70년대 초 뉴욕의 한 극장에서 유현목 감독의 영화 〈장마〉를 볼 때였어요. 장독대에 빗줄기가 쏟아지는 장면을 보고 외국인들이 탄성을 지르더군요. 그때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러다 89년 제주의 한 시장에서 할머니들이 입고 있는 갈옷을 보고 “너무 섹시하게 보이고, 뉴욕에서도 통하겠다. 저런 옷으로 미스 유니버스의 비키니라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인 모슬포에 감나무를 심고 본격적으로 천연 염색 갈옷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감물을 이용해 물감을 들인 갈옷은 빛깔이 고울 뿐 아니라 질기고 벌레가 슬지 않아 잘 상하지 않습니다. 또 그날의 기후와 바람, 햇볕에 따라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을 얻을 수 있지요.”
‘보셨습니까’라는 제주도 방언으로 된 ‘봅데강’이란 상표를 내건 그의 갈옷은 오히려 외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봅데강’은 2002년 한일문화교류전에 첫선을 보인 뒤로 현재 일본 다카시마야백화점 등에서 입점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그는 앞으로 3년내 일본 입점을 희망하고 있다.
“이제 시작이지만,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늘 시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겠어요. 민초가 살아온 것처럼, 엉겅퀴처럼 살아갈래요.” 블루진을 능가하는 우리 색깔, 우리 옷을 세계에 알리려는 그의 꿈이 민예학당에서 영글고 있다. 연락처 (061)323-4745.
함평/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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