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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여가

톨스토이·푸쉬킨·체호프가 사랑한 흑해의 크림반도를 가다

등록 2018-08-27 15:35수정 2018-08-27 16:36

동서양의 수천년 역사와 유적을 간직한 땅
크림산맥과 흑해의 아름다운 풍경 곳곳에는
신앙과 사랑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흔적

민족 분단을 결정한 회담이 열렸던 얄타
유대인의 요새 추풋칼레에는 신앙의 힘 오롯
술탄의 못 이룬 사랑이 흐르는 눈물의 벽
크림반도와 흑해의 풍경. 유럽과 아시아 문명이 만나는 크림반도에는 두 문명이 남긴 역사 유적이 풍부하다.(게티이미지)
크림반도와 흑해의 풍경. 유럽과 아시아 문명이 만나는 크림반도에는 두 문명이 남긴 역사 유적이 풍부하다.(게티이미지)

폴란드 영주 포트키 백작의 딸 마리아의 춤사위는 슬펐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을 갈구하는 크림한국의 술탄(왕) 기레이의 춤사위는 때로는 포악하고 때로는 용맹하지만 애절함이 묻어납니다. 기레이는 마리아의 약혼자까지 죽이고 마리아를 포로로 삼으면서까지 사랑을 쟁취하려 하지만 사랑은 힘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강렬한 악센트의 폴란드 무곡 마주르카가 맞춰 춤추는 마리아는 단호합니다. 그런데도 기레이의 왕비 지레마는 질투의 힘으로 마리아의 가슴에 칼을 꽂습니다. 기레이는 그런 지레마를 절벽에서 떨어트려 죽입니다.

유튜브에서 만난 러시아 발레 <바흐치사라이의 샘>의 줄거리입니다. 시를 발레로 옮긴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원작은 푸쉬킨의 시 <바흐치사라이의 분수>입니다.

푸쉬킨의 시와 발레 의 소재가 된 칸의 궁전 눈물의 벽과 푸쉬킨 흉상, 아래는 발레 공연 모습.(유튜브, 게티이미지).
푸쉬킨의 시와 발레 의 소재가 된 칸의 궁전 눈물의 벽과 푸쉬킨 흉상, 아래는 발레 공연 모습.(유튜브, 게티이미지).

시와 발레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기레이 술탄은 두 여인을 잃은 뒤 "돌도 눈물을 흘리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만들어진 눈물의 벽을 만난 푸쉬킨은 '비문의 낯선 글자 너머에서/ 대리석 위로 물이 졸졸 흐르니/ 물은 차가운 눈물 되어/ 쉬지 않고 방울방울 떨어진다.' 는 시를 남겼습니다.

바흐치사라이는 흑해가 품은 크림반도의 도시 이름입니다. 흑해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문명이 자웅을 겨루던 바다인 탓에 전쟁도 잦았습니다. 흑해가 품은 크림반도는 신화시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졌던 전쟁과 그로 인한 아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크림반도는 오래된 땅입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올비아, 판타카파이온, 시노페 등 식민도시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오스만제국, 러시아 등등 크림반도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바흐치사라이의 샘>의 주인공 술탄 기레이의 왕국 크림한국은 칭기즈칸의 후손인 타타르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1430년 성립된 이후 오스만제국의 팽창기에도 스스로 속국을 자처하며 국가를 유지했지만 1783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후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휴양지이자 남부 해운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문화적 번영을 누렸다고 합니다.

크림반도는 동서로 가로지르는 크림산맥을 중심으로 남부와 북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북부는 초원지대입니다. 스키타이족을 비롯해 훈족, 고트족 등 수많은 중앙아시아 종족이 크림반도를 탐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흑해에 연한 남부는 해운과 무역, 휴양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비잔틴 등 유럽의 여러 제국과 오스만제국 등이 식민도시를 세운 곳도 대부분 남부지역입니다.

크림반도의 크림은 '요새'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성곽부터 중세시대 제노바와 소련의 요새가 즐비한 풍경은 이름을 갖게 된 내력을 알게 합니다.

크림반도는 최근에도 주인을 바꿨습니다. 소련이 해체된 후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이었던 크림공화국은 2014년 러시아 편입을 주장했습니다. 크림반도 여행길이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이유입니다.

케르치 마트리다테스산.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오벨리스크가 흑해를 내려다 보고 서있다.
케르치 마트리다테스산.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오벨리스크가 흑해를 내려다 보고 서있다.

크림반도 여행은 크림자치공화국의 수도 심페로폴에서 시작합니다. 크림반도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도시는 1784년 러시아의 식민도시로 건설됐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심페로폴리스 유적에서는 청동기부터 철기에 이르는 유적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크림반도 동쪽 끝 그리스의 식민도시 판타카파이움과 로마가 지배하던 땅 케르치는 크림전쟁과 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습니다. 러시아가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전에 러시아인들이 세운 도시국가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러시아인이 사랑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마트리다테스 산에 오르면 시내와 흑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초기기독교인들의 피난처이자 예배당이자 무덤이기도 한 카타콤을 비롯해 스키타이 원주민 분묘,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등 공공건물 유적이 산재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오벨리스크를 비롯해 독일군에 저항하던 게릴라들이 은신하고 싸웠던 석회암채석장의 동굴 '아지무슈카이'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크림반도 남부 해안은 페오도시아, 수다크, 얄타, 세바스로폴 등의 도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페오도시아는 이탈리아에서는 카파로 불립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식민도시로 건설돼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도시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이 2년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의 국민화가로 불리는 바다 그림의 거장 이반 콘스탄티노비치 아이바조프스키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노예무역이 성했던 도시로 이탈리아 노예시장의 흔적과 제노바 요새 유적, 흑해의 절경인 카라닥풍경구와 황금의 문 등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수다크의 노을. 제노바 식민시대 시절 건립한 요새가 수다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수다크의 노을. 제노바 식민시대 시절 건립한 요새가 수다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긴 해변과 아름다운 산악 풍경과 비잔틴 시대의 유적을 만날 수 있는 도시 수다크는 이란계 유목민 알라니족에 의해 212년에 건설됐습니다. 11~12세기 무렵 비잔틴제국의 국제무역항으로서 역할도 담당했던 도시입니다. 아름다운 와인 저장고와 함께 와인 협동조합에서 크림반도의 비옥한 토지와 햇살이 키워낸 포도로 만든 와인을 시음할 수도 있습니다.

수다크를 지나면 우리민족에게 분단의 상처를 남긴 얄타회담이 진행된 도시 얄타입니다. 청춘들에게는 결혼식을 치르는 축복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인들은 치유의 힘을 지닌 도시로 믿고 있어 러시아 왕족과 귀족의 별장, 공원이 많습니다. 얄타회담이 열렸던 리바디아 궁전은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여름 궁전이었지만 스탈린 시대 요양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안톤 체호프가 말년을 보낸 곳도 얄타입니다. 흑해가 내려 보이는 언덕 체호프가 살았던 집은 온갖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체호프는 이곳에서 <벚꽃 동산>을 집필했습니다.

오로라 절벽 끝에 제비의 둥지. 노을이 지면 풍경은 더욱 매혹적이다. 흑해와 크림반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사랑의 성‘으로도 불린다.(게티 이미지)
오로라 절벽 끝에 제비의 둥지. 노을이 지면 풍경은 더욱 매혹적이다. 흑해와 크림반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사랑의 성‘으로도 불린다.(게티 이미지)

어디를 바라봐도 눈이 치유되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얄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제비의 둥지'입니다. 40m 높이의 오로라 절벽에 건립된 성은 규모는 작지만 흑해를 상징하는 건축물입니다. 1927년의 지진으로 절벽 일부가 무너져 오래도록 사용되지 않았지만 1960년대 후반 내진 보강 공사를 거쳐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초기 제비의 둥지는 크림전쟁에서 돌아온 장군이 목조주택을 짓고 홀로 고독과 낭만, 흑해와 사랑을 나눴던 곳이라 합니다. 현재의 성은 독일의 부호가 1913년에 새로 지은 건축물입니다. 흑해의 푸른 물빛과 깎아지른 절벽, 사람을 매혹하는 노을로 많은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흑해함대의 모항 세바스토폴에서 만나게 되는 유적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지나온 세월을 증명한다.
흑해함대의 모항 세바스토폴에서 만나게 되는 유적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지나온 세월을 증명한다.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흑해함대의 모항입니다. 크림전쟁의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거센 공격을 막아 낸 요새입니다. 레프 톨스토이도 이 전쟁에 참전해 흑해함대 기지를 지켰습니다. 톨스토이는 참전경험을 소설 <세바스토폴 이야기>로 남겼습니다. 정박 중인 흑해함대의 군함과 잠수함을 볼 수 있는 뱃길여행이 인기라 합니다.

다시 크림산맥을 넘어 푸쉬킨의 시가 되고 발레가 된 크림한국의 기레이 술탄의 도시 바흐치사라이로 향합니다. 바흐치사라이는 크림타타르어로 '정원의 궁전'이란 뜻입니다. 칭기즈칸 후예들이 세운 나라지만 153년에 지은 크림 칸의 궁전은 오스만제국의 양식입니다. 마리아가 묵었던 여인들의 숙소 하렘과 눈물의 샘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정원이 전해 내려오는 슬픔과는 다른 느낌이 들게 하는 곳입니다.

바흐치사라이에 가까운 '유대인의 요새'라는 뜻을 가진 동굴도시 추풋칼레는 꼭 둘러봐야 합니다. 추풋칼레로 오르는 중간에는 히브리어로 음각된 유대인들의 비석도 만날 수 있습니다. 절벽 곳곳에 남은 동굴에는 촛불에 그을린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한 선택한 고단하고 외로운 삶의 흔적입니다. 지금은 종교는 다르지만 우수펜스키수도원이 추풋칼레의 정신을 지키고 있습니다. 수도원 벽에 전지된 전 세계 정교회의 상징 문양들도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흑해를 초기에는 폰토스아크세노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방인에게 비우호적인 바다라는 뜻입니다. 최초의 그리스인 항해자가 당시 연안에 살던 원주민에게 사살됐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후 무역이 발달하면서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번영하게 되자 바다 이름은 이방인에게 우호적인 바다라는 뜻의 폰토스에우크세이노스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땅에 천국의 별들만 떨어지기를 바란다

모두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길 바란다.

비, 꽃, 산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병이 없고 전쟁이 없기를 바란다.

크림반도에 전해오는 노래의 일부입니다. 노래에 담긴 바람은 이뤄진 걸까요? 9월26일 가을을 맞는 크림반도에서 확인해보시지요.

상세일정과 여행안내 https://cafe.naver.com/han2015han/550

윤승일 기자 nagne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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