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사고 발생 시, 보험사가 손해사정 업무를 자회사인 손해사정법인에 맡기는 비율이 지난 5년간 8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티 이미지 뱅크
올해 초 집 근처 사거리 교차로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한 이아무개(47)씨는 사고처리를 위해 담당 보험설계사와 통화 중 ‘독립손해사정사’ 선임에 관해 물었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이씨는 “소비자가 따로 손해사정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뉴스를 보고 알았고, 이에 대해 문의하자 20년 차라는 보험설계사가 ‘그런 제도가 있냐?’고 되물으며 ‘그냥 보험사에서 알아서 해줄 테니 맡기면 된다’는 답을 들었다”고 전했다.
보험사들이 손해사정 자회사를 두고 가입자가 아닌 보험사에 유리한 손해사정 업무를 하는 ‘셀프 손해사정’ 관행이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한겨레>가 국회 정무위원회 황운하 의원(더불어민주당)을 통해 입수한 금융감독원 자료를 보면, 자동차보험을 취급하는 삼성·현대·케이비(KB)·디비(DB) 등 국내 4대 보험사 가운데 최근 5년(2017~2021) 동안 소비자가 독립손해사정사를 선임해 사고를 처리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반면, 자회사 손해사정법인에 손해사정을 맡긴 비율은 5년간 76.4~80.8%에 달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통계를 보면, 4개사의 총 사고 접수 건수는 556만4803건이었는데, 이 가운데 자회사 등에 위탁 손해사정을 맡긴 건수는 424만9986건으로 77.4%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삼성화재가 사고접수를 받을 경우, 자회사인 삼성화재서비스손해사정·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에 손해사정을 맡기고, 현대해상이 현대하이카손해사정에 손해사정을 맡기는 등의 비율이 10건 중 8건에 육박한다는 뜻이다.
자동차 사고 발생 시, 보험사가 손해사정 업무를 자회사인 손해사정법인에 맡기는 비율이 지난 5년간 8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티 이미지 뱅크
손해사정은 서류심사만으로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울 경우, 제3의 전문기관이 손해액을 산정해 보험금 지급 여부와 액수 등을 결정하는 조사업무를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험사가 손해사정법인을 자회사로 설립해 일감을 몰아주면서 보험사에 유리한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는 셈이다. 2016년 4월 보험업감독규정 개정으로 보험 가입자에게 보험사보다 먼저 손해사정사를 선임할 권리를 부여하고, 이 경우 선임 수수료를 보험사가 부담하도록 했지만, 현실에선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꼴”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만일 사고가 났을 때 보험 소비자가 독립손해사정사를 선임하고 싶으면, 법무법인 손해사정팀이나 독립손해사정법인 등에 연락해 상담을 통해 계약을 하면 된다. 이 경우 수수료는 보험사가 부담하게 된다.
심지어 보험업감독규정은 불합리한 손해액 또는 감액을 방지하기 위해 보험회사가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손해사정업무 위탁 모범 규준’ 마련을 보험협회에 맡기는 등 일방적으로 보험사에 유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황운하 의원은 “보험사가 자회사로 거느린 손해사정법인에 보험금 삭감을 유도하고, 이를 성과지표로 사용하는 등의 행위를 해도 현실적으로 막을 수가 없다”며 “소비자가 직접 손해사정사를 선임하는 독립손해사정사 제도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의료기관이 환자를 진료하고 건강보험료 지급을 요청하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심사하는 것처럼, 사고가 발생할 경우 어떤 기준으로 보험금을 지급할지를 결정하는 독립적 기관을 설립해 보험사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