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10일 저녁 서울 서초구 반포대교 인근 올림픽대로가 퇴근길 차량으로 붐비며 차량 뒷쪽 브레이크등에 불이 들어와 있다. 연합뉴스
우리나라 정부가 지난해 미국산 수입차 방향지시등 색상을 국내 규정과 동일하게 적용해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조항에 따라 연간 5만대 이하를 한국에 수출하는 미국 완성차 회사는 빨간색 방향지시등을 달아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운전자들은 “사고 위험을 키운다”며 개선을 요구해왔다. 우리나라는 방향지시등 색깔을 호박색(노란색)만 쓰게 하고 있으나, 미국은 빨간색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20일 정부가 지난해 10월 작성한 ‘한-미 에프티에이(FTA) 자동차작업반 훈령’ 문서를 보면, 우리나라가 미국 정부에 요구할 사항에 ‘방향지시등 색상 일원화’가 포함돼 있다. 두 나라는 자유무역협정의 원활한 이행을 위해 주기적으로 만나 현안을 논의한다. 지난해에는 11월1일 워싱턴 디시(D.C.)에서 두 나라 실무자들이 만나 자동차 산업과 관련된 사항들을 논의했다. 당시 논의에 참여한 정부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여러 해 전부터 방향지시등을 국내 규정에 맞춰 수출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해왔고, 지난해 11월 열린 회의에서도 재차 요구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반대 입장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한미 에프티에이(FTA) 자동차작업반 훈령 문서 갈무리
연간 5만대 이하 규모로 자동차를 우리나라에 수출하는 미국 제조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따라 미국 안전기준을 충족하면 국내 규정과 다소 맞지 않아도 국내 판매가 가능하다. 처음 기준은 ‘2만5천대 이하’였으나, 트럼프 정부와의 재협상 과정에서 ‘5만대 이하’로 늘어났다. 방향지시등 색상도 여기에 해당한다. 국내 규정엔 방향지시등은 호박색으로만 제작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으나, 미국은 호박색·빨간색이 모두 가능해 빨간색 방향지시등을 단 미국 차량이 문제없이 수입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운전자들은 빨간색 방향지시등에 익숙하지 않아 사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자동차 명장’ 박병일 박앤장 차량기술연구소 대표는 “빨간색 방향지시등을 잘 모르는 운전자들이 많다. 한쪽 브레이크등이 고장 나 다른 한쪽만 브레이크등만 불이 들어오는 걸로 여겨질 수 있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운전경력 6년차인 회사원 김 아무개씨도 <한겨레>에 “노란색 방향지시등에 익숙한 상황에서 빨간 깜박이를 보면 브레이크등이 고장 난 것인지 정상적인 깜빡이인지 쉽게 인식되지 않아 위험한 상황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우리나라의 개선을 거부하는 이유로 “빨간색 방향지시등이 위험을 유발한다는 구체적인 통계나 사례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 수출용 제조 라인을 따로 둘 경우, 자국 제조사의 생산 비용이 크게 증가한다는 이유도 댄다. 하지만 미국 제조사들은 이미 유럽에는 호박색 방향지시등을 단 차량만 수출하고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난해 8월29일 오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수출선적부두와 야적장에 완성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각에선 우리나라의 대미 자동차 수출량이 미국의 대한 수출량보다 많다 보니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운 게 아니겠냐는 분석이 나온다. 다른 정부 관계자는 “에프티에이 협약은 자동차 산업만 따로 떼어서 보는 게 아니”라며 “한국이 자동차 무역에선 우위에 있다 보니 일부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8년 미국 안전기준만 맞추면 수입 가능한 대수 기준을 2만5천대에서 5만대로 늘리도록
재협상한 것도 당시 국내 철강산업 쪽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자동차산업 쪽을 양보해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호근 대덕대 교수(자동차학)는 “미국 제조사들이 이미 유럽에는 호박색 방향지시등을 단 차량을 수출하고 있다. 생산공정을 약간만 바꿔도 큰 비용 증가 없이 한국 수출용을 생산할 수 있어, 비용이 많이 든다는 건 핑계에 불과하다”며 “방향지시등과 같이 안전과 관련된 부분은 한국 기준에 맞춘다는 내용으로 개정하지 않으면 우리 국민의 안전이 침해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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