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재정정책이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결정까지 좌우하는 ‘재정적 물가이론’이 미국과 우리나라 등에서 아직 발생하기 힘들다는 분석이 나왔다. 중앙은행이 독자적 목표를 갖고 통화정책을 운용하고 있어서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재정정책은 통화정책의 주요 변수는 아니라고 해도 직·간접적인 영향은 주고 있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경계선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은 19일 ‘최근 인플레이션 논쟁의 이론적 배경과 우리경제 내 현실화 가능성 점검’ 이슈노트 보고서에서 “코로나19 위기로 정책 금리가 실효하한에 도달하고 대규모 재정 적자가 발생함에 따라 재정적 물가이론 측면에서 재정 우위 상황의 물가 상승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주요국이 경제 위기를 대규모 재정정책으로 대응하면서 통화정책에 영향을 주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당장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내놓은 재정정책은 수요를 과도하게 촉진해 물가 상승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또 각국 정부가 재정정책 재원을 위해 발행한 국채를 중앙은행들이 매입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올리비에 블랑샤르와 찰스 굿하트 등 세계적 학자들은 지난해 정부가 막대한 빚에 대한 부담을 줄이려고 부채의 실질가치 하락을 위한 인플레이션을 시도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내놨다. 재정정책이 통화정책의 방향까지 결정할 수 있다는 걱정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은은 재정정책이 통화정책에 영향을 주는 ‘수준’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정적 물가이론이 발생하려면 중앙은행이 정부에 종속되어야 한다. 정부가 통화정책을 주도하며, 중앙은행의 역할은 재정정책을 보완하는 데 그친다.
다행히 우리나라 한국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아직 금융, 물가, 고용 안정 등 독립적인 목표를 가지고 통화정책을 결정하고 있다. 물론 재정정책 영향을 고려하지만, 그것이 주요 변수는 아니다.
한은 관계자는 “능동적 재정정책과 소극적 통화정책 조합일 때 재정적 물가이론이 발생하는 것으로 미국과 우리나라와 같이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주도하는 선진국에서는 나타날 가능성이 낮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관계에 대한 논쟁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재정적 물가이론 수준은 아니지만, 두 정책 사이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일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중앙은행이 스스로 통화정책을 판단해 조절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며 “그것에 따라 재정 우위 여부가 다르다”라고 강조했다.
전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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