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으로서 송구하다. 여당 의원으로서 더욱 그렇다. 11년 전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생협법) 개정으로 공제사업의 길이 열렸는데 아직 ‘상상’의 단어에 머물러 있다.”
지난 9월8일 생협 공제사업 시행방안 모색을 위한 국회 공동 기자회견 및 토론회. 더불어민주당의 민형배 의원은 여당 의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공정거래위원회를 강도 높게 질타했다. 정의당의 배진교 의원은 “공정위의 소극적 행정으로 12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공정위가 책임과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거들었다.
토론회를 공동 주최한 두레·아이쿱·한국대학·한살림·행복중심 등 5대 생협연합회도 “공정위가 12년간 생협 공제사업을 가로막아 국회 입법권과 생협 조합원 권리를 침해했다”고 맹비난했다.
왜 공정위는 동네북 신세가 된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생활 밀착형 소비자 운동의 선구적 조직인 생협을 활성화하고 생협의 자주·자립·자치적인 활동을 촉진시켜 소비자의 복지 향상을 넘어서 국민의 복지 및 생활문화 향상에 기여하려는 것.” 18대 국회는 2010년 3월 여야 합의로 공제사업 허용이 포함된 생협법 개정안을 처리하면서 그 취지를 밝혔다.
생협은 같은 지역이나 직장의 사람들이 생활의 안정과 문화 향상을 목적으로 상부상조하기 위해 만든 자율적 비영리조직이다. 공제는 조합원이 공동으로 기금을 쌓아 위험에 대처하는 상호부조 사업이다. 우리 조상들의 계와 유사해, 생협의 취지와 잘 부합한다.
조합원들이 최소 월 수천원의 소액을 모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다양한 사업을 운영할 수 있다. 경제적 부담으로 영리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조합원에 대한 상호부조, 치과 치료 등 공적 보험에 포함되지 않는 의료비 지원, 신용도가 낮아 대출을 못 받는 조합원에 대한 소액대출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놓치고 있는 복지 사각지대를 메워주는 구실도 한다.
생협의 공제사업을 허용하는 법 개정이 이뤄졌지만, 실제 사업을 위해서는 공정위가 하위 법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생협법 66조 1항은 “연합회(또는 전국연합회)가 공제사업을 할 때는 공제규정을 정해 공정위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역대 공정위원장들은 수차례 신속한 후속조처를 약속했다. 김동수 위원장은 2012년 3월 생협 대표자 간담회에서 “연내 공제사업이 시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노대래 위원장은 2014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기춘 의원의 질문에 대해 “(공정위-생협 공동으로) 생협 공제사업 티에프를 구성해 시행 준비를 마무리 짓겠다”고 답했다. 정재찬 위원장도 2016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공제사업을 할 수 있도록 연말까지 시행규정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상조 위원장은 내정자 시절인 2017년 6월 인사청문회에서 전국연합회에만 공제사업을 허용하는 내용의 생협법 개정안에 대해 “각 생협연합회의 고유한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공제사업 시행주체의 개선 필요성을 검토하겠다”고 수정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공정위원장들의 약속은 12년째 공염불에 그쳤다. 여야 의원들이 입을 모아 공정위의 직무유기이자 입법권 무시라고 성토하는 이유다. 민형배 의원은 “공정위에 생협의 공제사업이 왜 안 되느냐고 물으면 소비자 피해 우려 때문이라고 답한다”며 “140만명의 회원이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감안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날 위험이 적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같은 당의 이정문 의원은 “공정위가 소비자 보호를 위한 안전장치와 사후감독 방안을 마련해서 공제사업을 하도록 하면 되는데, 그 준비를 안 한다”고 질타했다.
이미 경찰공제조합, 교직원공제조합, 신용협동조합, 중소기업중앙회 등 다양한 주체들이 공제사업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민단체 활동가를 위한 ‘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 지역자활센터의 지원을 받는 자활근로자들이 중심이 된 전국주민협동연합회, 노동자 권익 증진을 위한 ‘노동공제연합 풀빵’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공제조합도 만들어졌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101개 공제조합이 활동 중이다.
코로나19로 사회적 약자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배달노동자들을 위한 배달공제조합 설립이 추진되는 등 앞으로 공제사업의 필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향숙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영리 목적의 보험과 달리 소비자 중심의 생협 공제가 필요하고, 이는 소비자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대안운동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서는 생협의 공제사업이 일반화된 상황이다. 이웃 일본이 대표적이다. 2019년 기준 일본 생협은 조합 수 898개에, 조합원 수가 6651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는다. 일본 생협 중에서 공제사업을 하는 조합은 499개로 56%에 이른다. 공제사업 규모 1위인 전국노동자공제생활협동조합연합회는 총자산이 3조9009억엔(한화 약 42조원)이다.
하지만 공정위는 생협의 공제사업 추진을 위한 정관 개정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다. 아이쿱생협은 2020년 4월 공제사업 추진을 위한 정관 변경을 공정위에 신청했다. 공정위는 이에 대해 “현행 생협법에서는 공제사업의 안정적 시행과 소비자 피해 방지가 어려우며, 제도 보완을 위해 생협법 개정을 검토 중”이라며 불허했다. 아이쿱생협은 공정위의 정관변경 거부 처분은 월권이라며 취소하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정관 개정 인가와 실제 공제사업 인가 절차는 법적으로 별개이고, 공제사업의 안정성과 피해 방지는 정관 변경 신청이 아니라 실제 공제사업을 추진할 때 다뤄야 할 사안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 8월 말 “공정위가 재량의 범위를 넘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다.
공정위가 생협 공제사업에 이처럼 조심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다단계판매 공제조합과 관련한 아픈 경험들을 지목한다. 공정위는 2002년 말 다단계판매 사업자를 회원으로 하는 직접판매공제조합 등 2개의 공제조합을 설립하도록 승인했다. 사업자들이 낸 기금으로 공제조합을 만들어 소비자 피해 보상을 한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조합 설립 초기에 사업자들이 낸 출자 준비금을 일시적으로 담당과장 명의 계좌에 넣어 관리하다가 비리 의혹이 제기됐다. 사업자들이 준비금 유용 방지 대책을 요청한 데 따른 것으로 밝혀지면서 혐의는 벗었지만, 공정위에는 지금까지도 떠올리기 싫은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후에도 제이유네트워크 등 불법 다단계업체들로 인해 대규모 소비자 피해가 발생하면서 공정위의 관리감독 부실이 도마 위에 오르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공정위는 그동안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억울해한다. 2014~2015년 생협과 공동으로 공제사업 허용을 위한 티에프를 가동해서 사업 추진 주체와 기준, 관리감독 방안 등을 논의했다. 2017년에는 전국연합회에 한해 공제사업을 허용하는 내용의 생협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송상민 공정위 소비자정책국장은 “공정위가 대안을 제시했지만 생협이 거부했다”며 “공제사업은 다소 늦어지더라도 (사업에 적극적인) 일부 조합보다 전체 생협의 발전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협은 공정위가 티에프 논의와 무관하게 전국연합회에만 공제사업을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낸 것은 사실상 허용할 뜻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이쿱생협 경영지원팀의 김영미 매니저는 “각 생협은 사업 내용과 방식이 상이하고, 탄생 배경과 이해관계 등이 달라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전국연합회를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도 공제사업을 하는 생협 중에서 연합회는 2%에 그치고, 나머지 98%는 지역 또는 직장 단위 조합이 차지한다.
생협은 1987년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본격화한 뒤 1998년 생협법 제정을 통해 30여년간 꾸준히 성장해 확고한 시민운동으로 터를 잡았다. 특히 2010년 법 개정 때와 비교하면 조합원 수, 매출액 모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두레·아이쿱·한국대학·한살림·행복중심 등 국내 5대 생협연합회 기준으로 조합원 수는 2010년 47만명에서 2020년 146만명으로 3배, 사업액은 5280억원에서 1조3272억원으로 2.5배 성장했다. 생협은 “공정위가 다단계판매와 비교하며 걱정하는 것은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생협은 공동 티에프에서 공정위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소비자 피해 방지, 재무건전성 유지, 안전한 상품설계 기준, 투명한 정보 공개 기준에 관한 세부 방안들을 이미 제시했다고 강조한다. 피해 방지를 위해서는 모집 과정에서 정확한 설명 의무를 부과하고, 불공정행위를 금지하도록 했다. 또 재무건전성을 위해 지급여력비율을 100% 이상으로 유지하도록 했다. 이향숙 선임연구원은 “공정위는 생협 공제사업의 감독기준을 새마을금고·신협·수협 등 개별 협동조합 공제조직과 동일한 수준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일반인 가입을 허용하고 자산규모가 몇조에 달하는 기존 공제사업과 생협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아이쿱생협 전국 조합 대표자 30여명이 지난 9월8일 세종시 공정거래위원회 앞에서 생협의 공제사업을 조속히 허용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아이쿱생협 제공
공정위가 소비자 안전을 강조하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비자 안전을 내세워 법에서 이미 허용한 공제사업을 12년째 방치하는 것은 정당화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공정위가 사고 위험만 피하려는 ‘보신주의’에 젖어 있다는 비난도 나온다. 공정위 한 간부는 “소비자 피해 사고는 무조건 막아야 하는데, 규제를 아무리 강하게 해도 사고는 발생할 수 있다”며 “소비자정책과의 담당 직원 1명뿐인데, 사후 관리감독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드러냈다.
공정위가 자력으로 관리감독을 할 자신이 없으면 금융감독기관과 협업하거나, 이마저도 어렵다면 생협의 주관부처를 아예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생협이 2018년 주무부처를 공정위에서 기획재정부로 옮기려 한 것은 공정위의 역량 문제를 고려한 것이었다. 공정위 전직 간부는 “공정위가 처음 다단계판매 공제조합 업무를 맡은 것은 다른 부처가 모두 골치 아프다고 회피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떠안은 것”이라며 “공정위가 생협 공제사업에 자신이 없으면 다른 부처로 넘기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2020년 11월 생협법 전면 개정을 위한 국회 토론회에서 시범사업을 포함해 제도 정비를 위한 협의를 재개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년이 가깝도록 실질적 진전이 없다. 조성욱 위원장은 9월 말 5대 생협 대표들과 간담회를 하기로 했다. 10월 초에는 공정위와 생협이 각각 추천한 자문위원들의 모임도 계획돼 있다. 또 정부는 공정위·농림축산식품부·환경부 등 관련 부처 공동으로 생협 활성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7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 말까지가 생협 공제사업 추진을 위한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봐야 한다. 아이쿱생협의 김영미 매니저는 “티에프 재구성이나 외부 연구용역처럼 원점에서 재논의하는 방식은 안 된다”며 “연내 공제사업 시행방안을 마련해 2022년부터 실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가 2020년 국회에서 제안했던 시범사업을 먼저 시작하는 것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