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과의 대화에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납품대금에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반영하는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이 새 정부 들어서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코로나19 확산, 세계 공급망 불안, 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이어지며 원자잿값이 고공행진하고 있지만, 납품단가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다.
22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보면, 원자잿값 상승을 납품단가에 연동하기 위한 법안들이 최근 잇따라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 김경만 의원 등 19명은 지난해 11월 상생협력법 개정안과 하도급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사전에 원자재 ‘기준가격’을 정해 놓고 시세가 대통령령으로 정한 비율 이상으로 상승하면 추가로 발생한 비용을 납품대금에 반영하도록 했다. 원사업자(위탁기업)가 이를 어기면 1억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국민의힘 한무경 의원 등 10명이 지난달 발의한 상생협력법 개정안은, 원자잿값이 10% 이상 ‘상승 또는 하락’하거나 최저임금이 ‘상승 또는 하락’할 때, 그 변동분의 분담에 관한 사항을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 간 약정서에 담도록 했다.
납품단가연동제는 원자잿값이 3년째 상승하던 지난 2008년에도 중소기업 업계를 중심으로 도입 필요성이 본격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거래 가격은 계약 당사자들끼리 정한다는 시장경제 원칙을 과도하게 훼손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아 당시 이명박 정부는 ‘납품단가 조정협의 제도’를 도입하는 수준에서 일단락했다. 납품단가가 변했을 때 수급사업자나 중소기업협동조합이 원사업자에 하도급대금 조정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협의제도의 실효성은 한계를 드러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철강류와 비철금속, 제지류, 목재류 등을 주원료로 제품을 생산·납품하는 401개 업체를 조사해보니, 조정신청 뒤 위탁기업이 협의를 개시했다고 응답한 비중은 51.2%에 그쳤다. 거래가 단절될 위험을 무릅쓰고 어렵게 조정을 신청했지만 절반 정도는 협의 자체를 거부당한 것이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들은 지금이라도 납품단가 연동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원자잿값 상승을 수급사업자 홀로 짊어지게 하는 건 ‘시장의 실패’로 국가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대기업 단체는 “사적 자치 영역인 계약금액을 자동 인상하게 하는 건 시장조정 기능을 저해하고, 원자재 가격 인상분을 최종 소비자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라는 기존의 반대 논리를 펼 것으로 예상된다.
연동제 도입에 공감대를 이루더라도, 구체적인 제도 설계 과정에서 갑론을박이 불가피하다. 연동제를 적용할 업종과 원자재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기준가격’은 무엇으로 사용할 것인지, 원자잿값이 하락하는 시기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적절한 연동 비율은 어느 수준인지 등 정해야 할 게 쌓여있다. 무엇보다 약정서 발급을 ‘의무화’하고 미이행시 처벌할 것인지, 또는 연동제 도입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을 채택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예상된다.
공정위는 법안 논의에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고, 우선 ‘납품단가 조정 가이드북’을 현장에 배포하기로 했다. 6월부터는 납품단가 조정 신청권과 원사업자 협의 개시 성실의무 등을 홍보하기 위해 권역별 현장설명회를 열 예정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8일 “하반기 중 납품단가 연동제를 시범 운영하고, 시장과 기업의 수용성이 높은 연동제 도입 방안을 강구하겠다”며 “납품단가 연동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보급하고 조정협의제도를 개편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납품단가 연동제를 잘못 설계할 경우 원자잿값 상승 부담이 중소기업인 수급사업자에서 중견기업이 많은 원사업자에게 이전될 뿐, 최종생산품을 판매하는 대기업은 분담 구조에서 비켜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자잿값 변동 위험의 회피 노력을 기울인 중소기업과 그렇지 않은 업체간 형평성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한국공정거래조정원의 김건식 공정거래연구센터장은 “조정 요청을 원사업자가 외면하면 그만인 현행 조정협의제도는 개선이 필요하지만, 납품단가 연동제도 상당한 부작용을 안고 있다”며 “발주자인 대기업까지 비용을 공평하게 부담할 수 있는 모델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하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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