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물가 오름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2022년 8월21일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을 찾은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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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인플레이션의 공포가 지구촌을 짓누른다. 미국은 2022년 6월 물가상승률(9.1%)이 4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주요 선진국 가운데 처음으로 영국에선 7월 두 자릿수10.1%) 상승률을 보였다. 한국 물가상승률(6.3%)도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다. 물론 밥상물가 또는 체감물가는 훨씬 더 비싸다. 동네 식당 음식값의 앞자리가 하나씩 올라갔고, 중견기업 P부장이 이따금 즐기는 메밀막국수는 7천원에서 9천원으로 뛰었다.
성장률 2% 안팎인 선진국에서 10% 가까운 물가상승은 경제위기 때나 볼 수 있던 현상이다. 주요국 경제학자와 전문가들은 한동안 인플레이션을 잊고 지냈다.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어 낮은 물가가 지속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낳을 정도였다. 노벨경제학상으로 불리는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쓴 ‘나는 인플레이션에 대해 틀렸다’(I was wrong about inflation)는 제목의 ‘반성문’은 인플레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분위기가 정부와 학계에 광범하게 퍼져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돈은 계산이 분명하다. 시장에 돈이 넘치면 그 가치가 떨어지고 물건과 서비스 가격은 오르는 것이 이치다. 지난 20년 남짓 미국과 유럽, 일본은 경기부양을 이유로 초저금리, 심지어 마이너스금리와 양적완화로 돈을 쏟아붓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무제한 돈 풀기에 나섰다. 그런데도 인플레가 생기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제 시장에 넘쳐나는 돈의 복수가 시작됐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빚의 복수’다. 그동안 시장에 공급된 유동성은 성장의 성과물이 아니다. 각국 정부가 거리낌 없이 지폐를 찍어내, 다시 말해 빚을 내 만든 것이다. 국제금융협회(IIF) ‘세계 부채 보고서’(Global Debt Monitor)를 보면 2022년 1분기 세계 부채가 330조달러(약 44경원)로 집계됐다. 2000년의 무려 4배에 이른다. 20여년 전의 돈과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없어도 부채가 유례없이 급증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플레에 취약한 대상은 월급에만 의존하는 직장인이다. 하지만 일정한 소득마저 없는 퇴직자는 더 먹고살기 힘들다. 최근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영국과 미국에서 ‘은퇴 포기∙취소’(Unretirement) 얘기가 자주 들리는 이유다. 고물가로 크게 늘어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다시 일터로 나가는 은퇴자가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 흐름을 ‘거대한 은퇴 취소’(Great Unretirement)라고 진단한 2022년 7월25일 영국 <가디언> 보도를 보면, 지난 1년 사이 일하거나 일거리를 찾는 65살 이상 남성이 8.5%(6만6천 명)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65살 이상 여성 증가폭은 6.8%(3만7천 명)였다. 최근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은퇴 예정자 150만 명이 은퇴를 보류했다.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8%가 직장 복귀를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나라는 물론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대다수 선진국에서 노동력 부족 사태가 심각해 은퇴자의 재취업을 재촉한다. 구인난은 코로나19에 따른 건강·가족 중시 경향, 이주노동자 감소,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여서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한국에선 이번 인플레이션 이전부터 충분히 많은 고령자가 경제적 이유로 일을 계속했다. 변변한 일거리가 없는데도. 통계청 7월 고용동향을 보면 65살 이상의 취업률이 38.8%로 1년 전보다 1.5%포인트 늘었다. 법정 정년인 60~64살까지의 약 64%, 65~69살의 약 52%가 일한다. 노동력 부족이라는 선진국의 공통적 현상이 시차를 두고 한국에도 닥치면 고령자 고용 여건이 나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초인플레시대에 더 위태로운 사람은 빚을 많이 끌어다 쓴 채무자다. 인플레가 발생하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니 통상 빚 부담이 줄어든다. 그러나 부채에 기반한 인플레를 잡으려면 신속한 금리 인상이 필수다. 빚진 사람은 고물가로 생활비가 쪼들리는 동시에 고금리로 급증하는 이자 부담의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초인플레와 고금리가 단기간에 해소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미국에선 물가상승률을 5%에서 2%대로 낮추는 데도 몇 년이 걸렸다.
일반인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빚은 가계부채다. 한국은 올 1분기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4.3%로 조사 대상 36개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가계부채 규모가 GDP를 웃도는 유일한 나라였다. 높은 이자 부담의 고통이 어느 곳보다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노후 설계의 무게중심을 빚의 복수를 피하는 쪽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빚갚기를 우선해야 할 때다. 집을 비롯한 부동산은 이미 가격이 많이 오른 터라 고금리에 따른 수요 위축으로 거품이 빠진다 해도 기존 주택 소유자가 손실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출을 많이 끼고 집을 샀거나 생활비를 조달한다면 매각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풀려 회수하기 바쁜 상황임을 고려하면 이자를 상쇄할 만큼 집값이 오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집을 팔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생활비를 받는 주택연금은 여전히 유효한 대안이다. 7월19일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주택연금 누적 가입자가 10만 명이 넘었다. 올 상반기 신규 가입자는 6923명으로 2021년 같은 기간보다 36.4% 늘었다. 이와 함께 국민연금은 물가연동 방식이어서 그나마 인플레의 고통을 덜어준다.
씀씀이를 줄이는 것은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기본적인 대책이다. 금리인상의 목표가 바로 소비 하락이다. 무작정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내 삶의 방식에 꼭 필요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소비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특히 물건 소비를 줄이면 넘치는 쓰레기와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는 지구와 미래세대에 도움이 된다. ‘힙한’ 노후생활이다.
park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