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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미-중 패권경쟁, 동남아·인도가 새로운 성장 프런티어 될 것”

등록 2022-10-19 11:00수정 2022-10-19 11:20

박현 논설위원의 직격 인터뷰 | 김계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

1980년대 미국, 일본 견제 위해 중국 끌어들여
미국-아시아 간 수직분업식 글로벌 공급망 형성
지금은 새로운 성장사이클 만들어지는 초입단계

한국이 혁신 플랫폼을 동남아·인도에 제공하고
혁신의 성과를 이들과 공유하는 체계 만들어야
미-중 부분적·선별적 디커플링 조만간 현실될 것
김계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이 6일 서울 삼성동 무역협회 중회의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김계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이 6일 서울 삼성동 무역협회 중회의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요즘 미-중 간 패권 경쟁이 가열되면서 경제안보가 화두다. 하루가 멀다고 미국이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 첨단산업의 대중국 제재를 강화한다는 소식들이 전해온다. 첨단산업 비중이 높은 한국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는데, 도대체 이 ‘전쟁’이 어떻게 언제까지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어 더 불안하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경제·기술·통상·외교·안보 등 거의 전 영역에 걸쳐 벌어지고 있어 분석도 쉽지 않다.

김계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은 이런 불확실한 지정학의 시대에 대한 남다른 시각을 지닌 인물이다. 지금껏 산업연구원의 여러 박사들과 연구원이 생산한 많은 보고서들을 접해왔지만, 국책기관의 연구자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거론하는 것을 본 것은 김 본부장이 처음이었다.

그는 서울대에서 경제학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유학 시절 프랑스에서 태동한 ‘조절이론’에도 관심을 가졌다. 조절이론은 국제관계, 생산방식, 금융정책, 경쟁양태, 노사관계 등 주요 부문들이 어떤 형태로 맞물리느냐에 따라 국가적·세계적 체계가 변화한다고 보는 경제학 이론이다. 조절이론가들은 일정 기간 안정적인 접합이 유지되다가 새로운 접합이 만들어지면서 경제가 패러다임적으로 변화해간다고 본다.

냉전 종결 이후 지속돼온 자유주의적 국제경제 질서가 대전환기를 맞는 지금 시기를 분석하는 하나의 틀이 될 수도 있다. 김 본부장은 요즘 자주 열리는 경제안보 세미나의 단골 연사가 됐는데, 그의 독특한 분석력 때문으로 보인다. 2007년 산업연구원에 합류한 그는 주로 산업·통상전략을 연구해왔으며, 지난해 말 <경제패권 경쟁 시대 전략적 자율성을 위한 산업통상 전략>을 대표 집필했다.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트레이드타워에서 인터뷰를 했으며, 이후 이메일로 추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를 근간으로 한 국제무역 질서가 미-중 갈등을 계기로 근본적인 전환기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현재 국제경제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앞으로 국제무역 질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최근 미국 워싱턴의 주요 인사들이 ‘뉴 브레튼우즈 모멘트’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1944년에 국제경제 질서를 만들기 위한 회의가 브레튼우즈 회의잖아요. 지금이 그때와 비슷한 근본적인 국제 경제질서의 재편이 필요한 시기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거죠.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국제경제의 규범·제도의 재설계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미-유럽 사이의 무역기술위원회(TTC),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칩4 등이 포함됩니다. 지난 30~40년간의 무역자유화와 금융세계화의 힘이 약해지고, 이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새로운 질서로의 모색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계경제의 중심-반주변-주변으로 이루어진 국가 간 위계질서에도 큰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따른 세계경제 위계구조의 재편이 그것입니다. 좀더 확대하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신흥국의 부상과 위계구조의 변화입니다. 새로운 산업혁명에 의한 주도 산업의 교체와 세계화에서 탈세계화로의 교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맥락·환경에 대응하면서 국제분업에 참여하는 기업·국가·개인의 ‘모두스 비벤디’(생활 방식)가 변화하고 있다고 봅니다.”

―미-중 패권 경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첨단기술 중심의 부분적 디커플링(분리)이 진행되고 있고, 디커플링 되는 분야도 점차 확대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까지 진행될 것으로 보시는지요?

“전략적으로 중요한 기술이나 제품, 산업에 관한 한 과도한 대외 의존을 축소하고 공급망을 국내 또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국가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미-중 디커플링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현실로서의 디커플링과 국가 정책·전략으로서 디커플링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의 디커플링 정책·전략을 그로 인한 실제 효과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디커플링을 의도한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만, 의도한 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의도된 결과를 낳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반도체와 과학법’과 ‘인플레 감축법’(IRA)도 각각 5년, 10년짜리 중장기 계획입니다. 의도한 성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불확실성이 무척 높습니다. 그렇다고 이 방향성이 역전되거나 미풍에 그칠 거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정치의 불가피한 측면인 레토릭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주의하면서 디커플링을 실제 데이터에 기반해 냉정하게 보자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디커플링 현상이 어디까지 얼마나 빨리 확산될 것인지인데요. 반도체·배터리·인공지능(AI) 등을 이중용도 기술이나 전략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주요국들이 공급망 안보 정책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이런 정책이 다른 산업이나 기술로까지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더욱이 전면적 디커플링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세계경제에 재앙 수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현실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부분적·선별적 디커플링이 현실이 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기술·산업과 나머지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전략 기술·산업에 대해서도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끼리 나름의 블록화를 형성해 공급망의 글로벌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방금 언급하신 ‘글로벌 공급망’이라는 생소한 용어를 일반 국민들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글로벌 공급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변천사를 간략히 설명해 주시죠.

“공급망은 제품이나 서비스가 콘셉트, 디자인에서 시작해 여러 생산 단계를 거쳐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과정 전체를 말합니다. 이 활동이 여러 나라를 거쳐 완결되는 방식이 글로벌 공급망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냉전 종식과 중국의 개혁·개방이 본격화한 1990년대 이후 세계화의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입니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에는 공급망 글로벌화 확산의 정체기가 시작되고, 2010년대 후반 들어 트럼프의 미-중 전략경쟁 선언, 영국의 브렉시트 등 자국 중심주의가 확산되면서 기존 글로벌 공급망의 디커플링과 탈세계화가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2020년 팬데믹,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디커플링 경향을 급가속하고 있고요.”

김계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이 6일 서울 삼성동 무역협회 중회의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김계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이 6일 서울 삼성동 무역협회 중회의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우리나라는 지난 30여년간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 질서 속에서 중국 경제의 급성장을 발판 삼아 주요 10개국(G10)의 지위까지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뉴노멀 시대를 맞아 통상·산업정책은 큰 틀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1990년대 이후 자유주의적 국제경제 질서에 가장 잘 적응한 나라가 유럽에선 독일, 아시아에서는 한국·대만인 것 같습니다. 1992년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선언한 것은 상징성으로나 방향성으로나 새로운 질서에 제대로 포지셔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독일 등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도 갖기 어려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산업 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1980년대 말 미국의 정책 선회 과정을 보면, 지금 중국에 위협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일본에 대해 위협을 느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의 부상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이런 식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는 중국을 끌어들이면서 일본을 견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에 수직분업 체계라는 방식의 글로벌 공급망이 형성됐고요. 미국과 아시아, 미국과 중국,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에 보완성이 대단히 높은 채널이 형성된 것이죠.

그런데 지금 다시 미국 주도로 국제 분업체계의 재편이 일어나는 시기가 아닌가, 이 방향을 보는 게 중요합니다. 당시 일본을 견제하듯이 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한다, 그러면 거기서 끝이 아니고 어디론가 다시 재편이 일어날 거란 말이죠. 중국에 집중돼 있던 생산기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새로운 성장의 사이클이 만들어지는 초입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거죠. 미국이 인도·태평양이라고 말하는 지역, 우리로 보면 동남아시아, 그리고 인도를 중심으로 한 서남아시아가 주요한 성장의 프런티어가 될 것이라는 거죠.”

―중요한 점을 짚어주신 것 같습니다. 동남아·서남아 시장의 잠재력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우리는 이 시장을 어떻게 개척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동남아와 인도는 산업화 확장, 디지털·그린 산업혁명의 확산, 미-중 세계화 전략의 충돌이라는 세 개의 프런티어가 겹치는 지역입니다. 이 세 가지 변화를 동력으로 이 지역으로 글로벌 투자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일본-한국·대만-중국에 이어, 동남아와 인도로 아시아 산업화와 경제 발전이 확산되는 현상입니다. 10여년 전 중국이 1인당 평균소득 5000달러 구간에 진입했듯이, 동남아도 비슷한 고성장기를 맞고 있습니다. 인구 규모를 무시할 수 없는데, 2020~40년 사이 중국의 16~60살 인구가 1억1400만명 감소하는 사이 인도는 1억6200만명, 파키스탄 6400만명, 인도네시아 2600만명, 필리핀 1900만명, 베트남·미얀마 각 400만명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마디로 동북아 국가들이 노령화되는 사이, 동남아와 인도는 젊은 아시아로서 잠재력이 커가고 있습니다. 노령화된 동북아와 젊은 동남아·인도 사이에 새로운 분업 관계가 형성돼 아시아 역내 공급망도 더욱 확대되고 조밀해질 것입니다.

중국의 산업적 부상이 우리나라 산업에 새로운 포지셔닝을 요구했듯이, 이제 동남아·인도의 부상이 새로운 포지셔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아시아 및 세계시장을 향한 혁신 허브로 만드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동아시아의 기업가 역량이 한국을 발판 삼아 혁신을 달성할 수 있도록 플랫폼 역할을 담당하자는 것이지요. 혁신 플랫폼을 한국이 제공하고, 혁신의 성과를 한국과 동아시아 국가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동아시아의 혁신 역량, 기업가 역량의 한국 유치에 있습니다.”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가 바로 그런 전략으로 이해가 됩니다. 아이피이에프는 한·중·일과 대만 등 동북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첨단산업 분업구조를 인위적으로 재편하려는 미국의 원대한 기획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의도가 현실화할 경우 우리나라 산업과 무역에 큰 충격이 불가피한데요. 어떤 전략으로 협상에 임해야 할까요?

“우선 아이피이에프를 미국의 대중국 견제, 첨단산업에서 탈중국 공급망 재편이라는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중 간 패권 경쟁의 측면이 덜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패권 경쟁 프레임에 갇히면, 우리나라처럼 끼인 국가들은 독자적 정책의 영역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부분적 디커플링이 함의하는 무역질서는 자유무역과 클럽형 무역질서가 공존하는 다층 무역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클럽형 무역질서는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 간에 블록을 형성하는 걸 말하는데, 신흥 핵심 기술이 그 매개체가 될 것입니다. 회원국 간에는 기술 이전·수출 통제 등을 조정하고, 사이버 보안 등의 공동 표준을 사용합니다. 나머지 나라에 대해서는 다자 간 무역체제나 양자 간 협정으로 기존 방식과 유사하게 관리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아이피이에프를 클럽형 무역질서, 소다자형 협정으로 보고 대응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아이피이에프, 칩4 등 지역별·부문별 무역 규범과 질서를 만드는 시도들에 우리도 ‘룰 메이커’(규칙 제정자)로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새로운 현실을 반영해 무역·외교 정책을 재설계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동시에 지역 및 양자 간 협상 노력을 강화해나가야 합니다. 특정 이슈에 대해서는 복수의 국가 간 협정에 참여해 룰 메이커 역할을 담당해야겠지요. 중견국으로서 우리나라는 이 변화에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고 강대국과 비대칭적 협상에 내몰릴 가능성도 있지만, 독자적인 가치와 비전을 가지고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면서 이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해관계와 능력이 유사한 ‘중견 강국’들과 연대 외교를 통해 미-중의 완충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 견해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다른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공급망 다변화의 관점에서 4강 중심 외교에서 중견국 연대, 끼인 국가 연대로 외교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또한 끼인 국가, 중견국으로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노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유럽연합(EU), 그리고 아세안·인도와 협력을 강화하고, 4강 외교를 이런 중견국 연대 강화로 보완하자는 것이지요.”

김계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이 6일 서울 삼성동 무역협회 중회의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김계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이 6일 서울 삼성동 무역협회 중회의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미국의 인플레 감축법은 한국 자동차 회사의 운신의 폭을 많이 좁히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인플레 감축법의 전기차 관련 조항은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성 조건으로 북미 내 자동차 조립,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 내 배터리 광물·부품 조달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기업으로서는 미국 시장 접근에 제약이 커지는 것이죠.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소규모 경제에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특히 우려되는 점은 글로벌화한 기업은 그나마 현지 투자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이런 경향이 확대되면 국내 산업 생태계는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국내에서 생산 경쟁력을 잃은 산업과 기업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해 산업 공동화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면, 이제는 여기에 더해 거대 시장 접근을 위해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해야 하는 사유가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국내 완성차 기업이 인플레 감축법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한 뒤에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점은 아쉬움이 있지만 이를 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미국·유럽·중국 등 거대 시장 경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제가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과도한 보호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중견국, 끼인 국가들이 협력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배터리 분야도 광물과 부품 조달을 몇년 안에 중국에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국가들로 바꿔야 할 처지입니다. 우리나라 배터리 업체들이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느냐보다 어떤 비용을 치르고 충족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배터리용 광물·부품의 생산이 중국에 집중된 것은 중국의 기술적 우위 때문이 아니라 규제 비용까지 포함한 비용상의 우위 때문입니다. 이제 지역별·거대 시장별 공급망의 다각화가 주요한 방향으로 부상한 이상, 당분간은 비용 상승에도 불구하고 이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일시적 충격이 불가피하겠지만, 미국의 제조업 생산 경쟁력 회복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미국은 지금 생산 측면에서는 추격자의 입장이고, 중국식·한국식 산업정책을 역수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효과적인 실행체계를 갖추느냐입니다. 미국이 실행체계에서는 중국만큼 체계적이지 않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식 동원체제 같은 민간 부문의 역량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미국 정부 정책에 민간 기업과 금융이 호응해 투자를 확대하는 선순환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미국 내 제조업 투자의 확대, 고용 확대, 생산성 상승, 내수시장 확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성장 모델이 작동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의 ‘반도체와 과학법’은 외국 반도체 회사들이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미국 내 공장 설립이나 연구개발 투자를 할 경우 10년간 중국 내 반도체 시설의 신·증설을 금지하는 이른바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전략을 어떻게 짜야 할까요?

“미국의 반도체 정책은 우위에 있는 기술의 대중국 수출과 투자를 통제하면서, 시장을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기업들의 중국 시장 접근을 어렵게 할 것입니다. 시장이 크지 않으면 대규모 투자의 회수가 불가능한 만큼 중국 시장을 대체할 만한 거대 시장 확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대규모 투자를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투자 리스크를 국가가 분담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보조금을 주거나, 최소 시장 규모에 대한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든 국가로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성 제한은 전면화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규모 시장이 이미 형성된 범용 반도체는 시장 접근성을 제한할 유인도 낮고, 비용이 너무도 큽니다. 따라서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성 제약은 첨단 제품으로 한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수출과 투자 제한의 수위를 어디까지 높일 것이냐를 두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요.

중장기적으로는 반도체 수요 산업의 이동도 고려해야 합니다. 여전히 중국이 글로벌 생산기지로 남을지, 동남아나 인도 등이 대안적 생산기지로 부상할지, 아니면 북미·유럽·중국 등 거대 시장 중심으로 다극화할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라 최종 도달점은 불확실합니다만, 지금까지의 공급망 및 시장 구조와는 크게 달라질 것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이에 맞게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안보를 공급망 회복력이나 소·부·장 경쟁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통상정책이나 대외정책의 기조로 내세우면 강대국의 보호무역주의 프레임에 말려들어갈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유럽연합은 ‘개방된 전략적 자율성’을 기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할까요?

“유럽연합의 개방된 전략적 자율성을 설명하는 데는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교수의 ‘트릴레마’(세가지를 동시에 취할 수 없는 딜레마) 개념이 유용합니다. 로드릭은 국민국가의 주권과 민주주의에는 기존의 ‘하이퍼 글로벌화’(초세계화)와 다른 대안적 글로벌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국제무역에 참여하는 방식과 조건을 참여 국가들이 독자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하도록 국가별 통제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안적 글로벌화 질서 속에서만 국민국가들이 상대적으로 큰 자율성을 누리면서 기후위기, 신기술 혁명 등 지구적 도전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이퍼 글로벌화는 퇴조하고 있지만, 이런 대안적 글로벌화가 아닌, 자국 중심주의와 보호주의 확산의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 강대국들의 무역·산업정책은 신흥국에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기술·산업 주도권을 재탈환하려는 자국 중심주의의 확산 현상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된 환경 속에서 한편으로는 전략적 산업정책으로 기술·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안적 글로벌화를 주창함으로 강대국과의 양자 간 협상에서 오는 비대칭성을 완화해야 합니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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