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앞 광장에서 유엔(UN)이 정한 제32회 ‘세계 노인의 날’을 맞아 일하는 노인의 고용안전망 강화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신효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 jinnytree@hani.co.kr
윤석열 정부가 처음 편성한 내년 예산안으로 서민·취약계층 등 사회적 약자 복지가 실질적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학계·시민단체 쪽에서 제기됐다. 이들은 고물가에 생계비 부담이 커진 저소득층을 위해 소득 지원을 확대하고, 감세 철회로 그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9일 포용재정포럼 주관으로 열린 ‘경제 사회 위기 속 나라 살림,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정책 토론회에서 “정부가 2023년 예산안에서 ‘약자 복지’를 강조하지만, 실제 내용에서는 그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오 정책위원장이 문제 삼는 건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정부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 지급하는 생계 급여액과 생계·의료·주거·교육급여 등 각종 급여의 지원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이 되는 ‘기준 중위소득’(국민 가구 소득의 중간값)을 올해에 견줘 내년 5.47%(4인 가구 기준) 인상해 저소득층 지원을 대폭 확대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오 정책위원장은 “이는 2026년까지 기준 중위소득을 단계적으로 높인다는 정부 계획에 따른 것으로, 윤석열 정부의 정책 의지가 담긴 수치가 아니다”라며 “최근 물가 상승세를 고려하면 내년 인상률로는 복지 급여를 통해 실질 구매력도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지난 2020년 정부는 ‘복지 기준선’인 기준 중위소득이 실제 정부 통계(가계금융복지조사)상의 중위 소득에 크게 못 미치는 까닭에 이듬해부터 오는 2026년까지 6년에 걸쳐 격차를 줄이기로 했다. 내년에 기준 중위소득이 5.47% 오르는 것도 이런 방침에 따른 것인 만큼, 이를 두고 약자 복지를 확대했다고 하는 건 ‘생색내기’라는 게 오 정책위원장의 지적이다.
또 그는 “내년 공공 임대주택 예산이 올해보다 5조7천억원 감소하는 것은 약자 복지에 반하는 심각한 일”이라며 “공공 임대주택 입주를 원하는 저소득 세입자가 많음에도 이를 줄이고, 대신 분양주택을 늘리는 주거 정책은 현 정부 주거 복지의 핵심 대상이 ‘주거 약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오 정책위원장은 “현재 노인들에게 중요한 소득 지원 역할을 하는 공공형 노인 일자리 축소도 약자 복지를 훼손하는 예산 편성”이라고 했다. 기획재정부는 앞서 지난 9월 초 국회에 내년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올해보다 6만1천개 줄인 예산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저소득 어르신의 빈곤이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잇따르자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도 지난 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늘리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오 정책위원장은 “정부가 진정으로 약자 복지를 말하려면 기준 중위소득을 추가로 인상하고, 공공 임대주택과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원상 회복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확대하는 방향으로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김유찬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포용재정포럼 회장)는 “식품, 에너지 비용 등 물가 상승으로 기초연금·실업급여·기초 생계비 등 고정 소득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이들의 실질 소득이 감소하고, 이로 인한 소비 위축으로 소규모 사업자들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정부 재정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이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높은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소득 지원이 병행되지 않으면 서민들의 삶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며 “경제 상황에 부응하는 정부의 지출 확대가 불가피하다. 국가부채를 크게 늘리지 않고 통화 긴축 정책과 발맞추기 위해 부자 감세를 철회하고, 증세를 통해 지원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도 “(정부가) 5년간 60조원에 달하는 감세 정책으로 충분한 건전 재정을 이루지 못하고 물가 상승, 노인 인구 증가 등 사회적 지출 수요도 쫓아가지 못하는 예산을 편성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는 고령화로 재정이 파탄 날 것처럼 위기감을 조성하지만, 장기적인 재정 건전성을 위해선 선진국 평균보다 낮은 사회 보험료와 세금 부담을 높이면 된다”고 했다.
이날 토론회를 주관한 포용재정포럼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 해소와 지속 가능한 성장, 사회 안전망 확충 등을 위해 학계·시민단체·연구기관 종사자 11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해 올해 1월 출범한 단체다.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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