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태원에 문을 연 고급 치킨 전문점 ‘교촌필방’ 입구. 오른쪽에 걸린 커다란 붓을 당기면 문이 열린다. 교촌치킨 제공
‘참신한 공간이 새로운 수요를 만든다?’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외식사업이 침체하자 배달로 눈을 돌렸던 치킨업계가 엔데믹 이후 ‘공간 마케팅’에 골몰하고 있다. 당장 음식을 판매해 매출을 올리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공간이 주는 ‘가치’를 고객이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브랜드 로열티를 높이면, 결과적으로 더 장기적인 소비가 창출된다는 ‘공간 마케팅 전략’을 도입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 국내 치킨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다. 2021년 기준으로 국내엔 484개의 치킨 브랜드가 있으며, 전국에서 프랜차이즈 가맹점 2만7303개와 비가맹점 1만5440개 등 모두 4만2743개의 치킨 전문점이 운영 중이다. 코로나19 이후 배달료 인상 탓에 배달앱을 통한 치킨 소비도 줄었다. 이미 2만원을 훌쩍 넘어 3만원에 육박하는 치킨값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도 들끓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치킨업계가 앞다퉈 차별화한 공간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 개선·각인에 나서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치킨업계가 타깃팅하는 연령층은 10~30대 젊은 소비자다. 엠제트(MZ·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세대는 물론 향후 주력 소비자로 발돋움할 잘파(Z세대+그 이후 알파세대)세대에까지 브랜드 정체성을 각인시킬 수 있는 유혹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공간이 들어서는 위치부터 고심을 할 수밖에 없다.
입구를 들어서면 나타나는 복도. 왼쪽 선반을 밀면 비로소 교촌필방 매장 안으로 입장할 수 있다. 교촌치킨 제공
🍗 ‘치킨 고급화’의 끝판왕…이태원 ‘교촌필방’
교촌치킨은 지난달 서울 핵심 상권 중 하나이자 외국인 왕래도 빈번한 이태원에 ‘교촌필방’이라는 이름의 새 직영 매장을 열었다. 교촌치킨 관계자는 “교촌은 치킨에 소스를 바를 때 붓을 이용한다는 점을 형상화해 ‘붓’을 모티브로 한 공간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교촌필방은 입구부터 엠제트 세대의 취향에 맞췄다. 간판도, 입구도 없는 건물의 벽에 설치된 커다른 붓을 아래로 당기면 스르륵 문이 열린다. 엠제트 세대가 열광하는 ‘스피크이지바’(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돼 있지 않고 홍보도 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가게) 콘셉트를 적용한 것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복도 양쪽으로 늘어선 선반 중 왼쪽을 밀면 그제야 매장에 들어설 수 있다. 입구부터 ‘공간의 재미’를 느끼게 디자인했다는 설명이다.
397㎡(120평) 규모의 내부는 무형문화재 박경수 장인이 제작한 대형 자개 붓을 설치하고 붓 주변에서 안개가 뿜어져 나오도록 설계하는 등 신비스런 느낌을 강조했다. 접시와 거울 같은 소품도 모두 ‘붓질’을 모티브로 제작됐다.
서울 이태원 ‘교촌필방’에서만 맛볼 수 있는 네가지 메뉴의 ‘팔방 시그니처 플래터’. 함께 주는 붓으로 소스를 발라 먹을 수 있다. 교촌치킨 제공
지난 19일 교촌필방에서 만난 안현우(25)씨 등 일행 3명은 “고등학교 동창끼리 오랜만에 만나는데 참신한 공간을 찾다가 선택하게 됐다. 인테리어가 신비롭고 특이한 게 강점인 듯 싶다. 평일 저녁인데도 밖에 3팀이나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말했다.
교촌필방은 ‘치킨의 고급화’를 내세운다. 네 가지 메뉴를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필방 시그니처 플래터’, 수제맥주로 마리네이드한 ‘필방 스페셜 치킨’, 야채와 함께 조리한 닭볶음 요리 ‘필방 궁보계정’ 등은 교촌필방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메뉴다. 별도 공간에서 닭 특수 부위를 활용한 요리를 코스별로 맛볼 수 있는 ‘치마카세’(치킨+오마카세)도 있는데, 8월 말까지 메뉴와 인테리어 리뉴얼에 들어간 상태다.
이태원에 위치한 만큼 외국인 손님도 많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텍사스에서 한국 여행을 왔다는 다니엘(24) 등 일행 4명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곳이 이태원 명소인 것을 알게 돼 방문하게 됐다”며 “붓으로 소스를 발라 먹을 수 있는 메뉴도 ‘힙’하고, 입구와 내부 디자인도 ‘쿨’하다. 바삭바삭한 한국 치킨 맛에 반했다”고 했다.
굽네 플레이타운 1층에서 자유롭게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 굽네 제공
🍗 젠지세대 위한 ‘가성비 놀이터’…‘굽네 플레이타운’
교촌치킨과 정반대로 굽네는 ‘가성비’를 내세운다. 서울 홍대 근처에 위치한 ‘굽네 플레이타운’은 치킨·피자를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다. “공짜로 놀고 즐기고 가라”는 모토처럼, 1층부터 4층까지 층별로 서로 다른 컨셉을 적용한 놀이공간에 가깝다. 누구나 돈을 쓰지 않으면서 들어와 셀카를 찍고, 전시를 보고,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가성비를 앞세워 주머니가 넉넉치 않은 1020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전략이다.
지난 20일 저녁 이곳에선 20대 한 무리가 휴대전화 초시계를 들고 피자 이름을 반복해서 말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블랙 트러플 스테이크 시카고 피자, 블랙 트러플 스테이크 시카고 피자….” 이유를 묻자 “10초 안에 5번 외우면 피자를 공짜로 받을 수 있는 이벤트를 한대서요”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굽네 플레이타운에서 자유롭게 공연을 지켜보는 사람들. 굽네 제공
1층 ‘굽마트’에선 음식과 각종 굿즈, 굽네와 콜라보레이션을 한 맥주(짠하자굽), 제과(풍년제과 ‘고바삭 초코파이’), 음료(댄싱 사이더) 등을 판매한다. 물론 구매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2층 ‘사운드홀’에선 무명 가수 ‘김휠’이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온라인을 통해 미리 신청하면 버스킹을 하는 가수들이 무료로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엔 12가지 보드게임이 갖춰진 선반도 있는데, 누구나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3층에는 인증샷을 위한 미디어아트와 포토존이 설치돼 있다. 르세라핌의 굽네 광고 배경을 재현한 포토존은 줄을 서서 인증샷을 찍는 명소가 됐다. 4층은 각종 전시를 즐길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로 꾸며져 있다. 신진 작가를 발굴해 공짜로 전시공간을 대여하고, 방문객은 공짜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전략이다. 29일까지 전시를 하는 작가 콘스텔라 디엘은 “다른 갤러리는 작품을 보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지만, 이곳은 오며가며 자연스럽게 작품을 접하는 문화공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공연, 전시, 먹거리, 놀이를 복합적으로 향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굽네를 운영하는 지앤푸드 관계자는 이곳을 ‘포스트 팝업’이라고 강조했다. “반짝 인기를 끄는 물건을 팔거나 브랜드 각인 만을 강요하는 팝업 스토어가 아니라, 나만의 콘텐츠를 중요하게 여기는 젠지세대의 특성을 반영한 공간이다. 이곳에선 누구나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
서울 송파구 송리단길에 위치한 ‘비비큐 빌리지’ 모습. 제너시스 비비큐 제공
🍗 낮엔 브런치 카페, 밤엔 치맥바…BBQ 빌리지
서울 송파구 송리단길에 지난해 12월 문 연 ‘비비큐 빌리지’는 밤에 들러 포장해 가는 치킨집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언제든 찾아오면 원하는 메뉴를 즐길 수 있는 ‘크로스오버 매장’이다. 커플 데이트 명소이자 맛집의 성지로 유명하다. 엠제트 세대 유동 인구가 많은 ‘송리단길’에 자리를 잡은 이유다.
이곳에선 치킨 외에도 브런치, 베이커리, 커피, 화덕피자, 파스타 등 190가지가 넘는 메뉴를 즐길 수 있다. 제너시스 비비큐 관계자는 “낮에는 브런치 카페로, 밤에는 치맥바로 인기를 끌어, 주말엔 100팀 가까이 줄을 서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528㎡(160평) 규모 매장에서는 화덕으로 피자를 굽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30가지가 넘는 베이커리 빵 역시 20년 넘는 경력의 파티시에가 직접 굽는다. 화덕피자·치킨·햄버거 등을 메인으로 빵·샐러드·커피가 포함된 브런치 세트 ‘플레터’와 3단으로 구성된 ‘애프터눈 티세트’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차별화된 메뉴다.
서울 송파구 송리단길에 위치한 비비큐 빌리지에서는 피자 도우를 반죽하고 화덕에 굽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제너시스 비비큐 제공
석촌호수와 롯데월드타워가 인근에 있는 터라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미국 250개 등 57개국에 700여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제너시스 비비큐는 비비큐 빌리지가 외국인들에게 ‘케이-치킨’을 알릴 수 있는 전초기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달 30일엔 울산 중구 젊음의 거리에 성남점도 문을 열었다. 직영점인 송리단길점과 달리 울산 성남점은 첫 가맹점 매장이다. 비비큐 빌리지 가맹사업이 본격화한 셈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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