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미래연구원 연구보고서를 보면 20대 국회에서 건당 평균 10분 남짓 심사해 9천여건의 법안을 법률로 만든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7일 국회 본회의장 모습. 연합뉴스
국회의원들의 법안 발의가 급증하고 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집계를 보면, 16대 국회에서 1651건이었던 의원발의 법률안은 20대 국회에서 2만1594건으로 5회기만에 무려 12배 넘게 증가했다. 21대 국회에선 7월 말 기준 2만2천건을 넘어섰다. 21대 국회 임기(2020~2024)가 10개월가량 남은 만큼, 지금 추세라면 의원발의 법안은 2만5천건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박상철 국회입법조사처장은 “의원들의 입법활동이 활발해지고 의원발의 법률안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이라는 점에서 국회의 긍정적 변화로 볼 수 있다”면서도 “다만 법률안 검토 업무의 부담 또한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몇몇 법률은 의도한 바와 다르게 국민들을 어렵게 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법안 발의 건수의 많고 적음을 갖고 입법 활동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 입법량이 주요국 의회에 견줘 과도하게 많을 뿐 아니라 특히 사전 영향분석 없이 진행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회미래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국회의원의 1인당 평균 법안 발의 건수는 80.5건(20대 국회 기준)인데,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40.6건)의 2배이고, 프랑스(3.5건)나 독일(1.2건), 일본(1.3건)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많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주요국 입법시스템 비교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의원 발의법안 증가로 법안가결률이 하락하고 임기만료로 버려지는 폐기법안이 증가하는 등 입법효율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16대 국회에서 37.7%였던 법안가결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해 20대 국회 13.2%, 21대 국회에서는 9.4%까지 떨어져 독일(67%), 일본(43.8%), 영국(16.5%), 프랑스(12.7%) 등 주요국 가결률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홍완식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안발의가 활발하다는 것은 민의를 잘 반영한다는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법안심사 부담을 가중시키거나 입법품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실제 20대 국회 기준으로 보면 1개 법안에 대한 심사시간이 13분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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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발의 2만2천건, 5회기만에 12배↑
정부안도 국회 통한 ‘청부입법’ 많아
전체 법안중 의원입법 비중 97% 달해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의원법안 2만2천건 가운데 5200여건만 처리됐을 뿐 1만5천여건이 계류(미처리) 중이다. 올해 핫이슈로 떠오른 전세사기 사건의 경우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58건이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은 건 8건뿐이다. 나머지 50건의 법안은 상임위에 계류중이거나 폐기 또는 철회됐다. 20대 국회에선 가짜뉴스 관련 법안이 수십건 발의됐으나 2건만 가결됐다. 국회에서 이렇게 경쟁적으로 발의되는 법안을 흔히 ‘레커법’이라고 한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현장으로 몰려가는 견인차 레커(Wrecker)에 빗댄 말로, 특히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사고에 법안 발의가 쏠리는 현상을 말한다.
전세사기 관련 법안의 경우 대규모 재산범죄를 가중 처벌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 중요하고 시급하게 다뤄야 하겠지만 이렇게 하나의 이슈에 법안 발의가 몰릴 경우 중복 또는 과잉에 따른 졸속 심사가 불가피해진다는 게 문제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의원발의 법안의 입법 과정에서 법안의 영향력과 효과를 따져보는 사전 영향분석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상한 한국행정연구원장은 “정부 입법안과 달리 의원발의 법률안은 사회경제적 영향분석을 의무화하지 않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영향분석 없이 법을 만들어 국민 편익을 해친 사례가 모빌리티 서비스 ‘타다’를 불법으로 규정한 이른바 ‘타다금지법’이다. 타다 사건은 최종적으로 지난 6월1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이 공유플랫폼운송 서비스는 2020년 국회의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으로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당시 총선을 앞두고 택시기사들의 표를 의식한 여야는 법안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신기술에 기반한 승차 공유플랫폼의 등장과 기존 사업자의 충돌을 중재해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함에도 국회는 입법권으로 차단해 버렸다. 정준화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의원발의 법률안은 사전적 규제심사 절차가 없고, 법제화되면 보완·개정이 쉽지 않다”며 “법률안의 시행에 따라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전반적인 영향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예측·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헌법 제52조는 법률안 제출권을 정부와 국회의원에게 부여하고 있다. 정부입법의 경우 발의 전 단계에서 규제개혁위원회와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심의 등을 거친다. 반면 의원입법은 의원 10명이 서명하면 발의할 수 있다. 간혹 국회 법제실을 경유하기도 하지만, 21대 국회에서 법제실 검토를 거쳐 제출된 법안은 30% 수준에 그친다. 국회는 법안 발의의 질적 제고를 유도하기 위한 제도 도입을 모색하고 있다. 이른바 ‘입법영향분석 제도’다. 의원이 법안을 발의할 때 입법영향 사전 검토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소관 상임위원회의 법안 심사 때도 입법영향 분석을 요청하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이와 관련해 21대 국회에는 윤재옥 의원안, 이종배 의원안, 정경희 의원안, 홍석준 의원안(이상 국민의힘), 김태년 의원안, 신정훈 의원안(이상 더불어민주당) 등 모두 6건의 국회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앞서
17대 국회 때부터 입법영향분석 도입을 뼈대로 한 국회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지만, 모두 회기만료로 폐기됐다. 해당 법안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의원입법에 대한 사전 절차가 강화될 경우 입법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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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심사 절차 까다로운 정부안과 달리
입법권 강화·민의 반영은 긍정적이지만
중복·과잉 발의로 인한 부실 입법 초래
사전영향분석 없이 의원 10명 모아 발의
“품질제고 위해 입법영향분석 도입 필요”
이번 회기에는 김진표 국회의장의 의지가 강한데다 여·야 공감대도 형성돼 있다. 김 의장은 지난 7월10일 국회에서 윤재옥·김태년 의원실과 국회입법조사처, 한국행정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더 좋은 법률만들기 공동세미나’에 참석해 “6개월에서 1년이 넘게 걸리는 정부입법 준비 과정을 생략한채 의원입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법안 심의과정에서 여야는 물론 상임위 간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며 “입법영향분석을 통해 입법품질을 높이는 일은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여야는 입법영향분석 제도의 도입 범위와 방법 등 각론에서 이견이 있고 시민사회와의 입장 차이를 좁히는 문제가 남아 있다. 여당은 특히 규제영향분석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한 국회 관계자는 “입법영향분석 제도 도입 과정에서 여당은 규제완화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지금도 대기업집단은 충분히 목소리를 내고 있고 이해를 관철시키고 있다. 예컨대 새로운 산업이나 기술이 등장하면서 야기하는,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꼼꼼히 분석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도 입법영향분석 제도 도입에 공감하지만 대기업 중심의 규제 완화에 치우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비용 추계도 논점이다. 발의 법안의 사회·경제적 영향을 분석할 때 측정가능한 것 위주로 비용과 편익을 추계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가치가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고 시민단체들은 우려한다. 국회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석한 남은경 경실련 국장은 “국회의원을 통한 이른바 ‘청부입법’이 초래한 많은 부작용을 정제하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면서도 “이 제도가 규제 완화에 치우쳐 대기업 민원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국회미래연구원의 박상훈 연구위원은 입법연구보고서에서 “언론과 시민단체들도 법안 발의 건수와 같은 양적 지표로 줄세우기식 의원 평가를 반복하기보다는, 입법부가 제 역할을 하고 권한을 키워 갈 수 있도록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홍대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어젠다센터장
hongd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