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의 갤러리아 백화점 뮐러스트라세 지점의 의류매장 곳곳에 ‘점포정리 할인’ 안내문이 붙어 있다. 옥기원 기자
‘점포정리 바겐세일’
7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 중심지역에서 멀지 않은 뮐러스트라세의 갤러리아 카우프호프 백화점 매장 곳곳에는 최대 50% 세일’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손님은 잘 보이지 않고 이월 상품들과 이미 사용한 박스들만 널브러져 있었다.
매장 1층에서 귀금속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레로나씨는 “폐점 전에 싸게 줄 테니 둘러보고 가”라며 기자의 손목을 끌었다. 올해 말 백화점 폐점을 앞두고 재고정리를 해야 하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는 “코로나19 이후 손님이 끊겼다가 작년 말부터 잠깐 느나 싶었는데 갑자기 폐점한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갤러리아는 정부가 운영하는 경제안정펀드(WSF)를 통한 대출 지원이 끊기자, 지난해 말부터 독일 내 180여개 매장 중 50여곳을 순차적으로 폐점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140여년 역사의 국민 백화점인 갤러리아의 파산은 독일 경제의 총체적인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상승 부담과 물가 상승 등이 겹치면서 독일 국민의 지갑이 얇아진 게 백화점 유통 체인의 유동성 위기를 높였다.
매장 3층에서 남성 의류를 파는 헬모트씨는 “독일 사람들은 경제가 안 좋으면 지갑을 닫는다. 얼마 전까지 손님이 거의 없다가 점포 정리 세일로 가격을 낮춘 뒤에야 손님이 조금 생겼다”고 했다. 독일의 백화점은 중저가부터 고가 브랜드까지 다양한 상품을 판매해 서민 경제를 가늠할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한국은행은 지난 9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독일은)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줄이는 과정에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여 가계의 실질구매력이 감소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독일 베를린 말묘어 스트리트 28번지 주택가에 공사 중인 콘크리트 구조물과 건설 자재들이 쌓여 있다. 옥기원 기자
독일 시민들이 모이는 명소인 마우어파크 주변 고급 주택가 중앙엔 공사하다 만 콘크리트 구조물이 덩그러니 방치돼 있었다. 부동산 개발사인 ‘프로젝트 이모빌리엔’이 올해 말 완공할 계획인 84세대 아파트형 빌라다. 지난달 말 자금난에 공사가 중단됐다.
맞은편에서 맥주집을 운영하는 상인은 “이모빌리언이 추진하던 13곳의 공사가 중단돼 수백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이보다 더 많은 개발사가 파산해 베를린 곳곳이 (항의하는 시민들로) 시끄럽다”고 했다. 독일의 부동산 개발업체들은 금리 상승과 인건비, 원자재 가격 급등 여파로 자금난에 내몰려 줄줄이 파산을 선언하고 있다.
독일 제조업의 상징인 자동차 산업도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는 상황에서 독일 브랜드의 지배적인 존재감이 약해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에스엔이(SNE)리서치의 올해 상반기 전세계 전기차 시장점유율을 보면, 중국 비야디(BYD)가 20.9%, 미국 테슬라가 14.4%, 상하이자동차그룹(SAIC)이 7.5%로 선두를 달렸다. 독일 폴크스바겐은 6.7%로 5위권에 들었다.
독일은 한국과 함께 중국 경제의 부상에 힘입어 제조업 위주 산업구조를 유지한 대표적 나라였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7월 독일 경제가 제조업 부진과 가계소비 위축 등으로 인해 주요 7개국(G7) 가운데 올해 유일하게 역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일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4분기(-0.4%)부터 두 분기 연속 역성장을 했다. 독일 노동청은 올해 7월 실업자 수가 261만명으로 지난해 말보다 약 16만명 늘었다는 발표도 내놨다. 다시 동·서독 통일 이후인 1990년대 당시처럼 ‘유럽의 병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베를린에 사는 교민 김주혜씨는 “집 월세와 에너지비용이 크게 올랐고 즐겨 먹던 케밥 가격도 두배 가까이 올라 서민들이 느끼는 경제 불안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베를린/옥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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