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30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활주로에서 아시아나항공 소속 항공기가 이륙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업 빅딜’에 이어 ‘항공업 빅딜’ 마저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이 내건 조건에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에 기반한 합병에 대한 회의론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특히 세계 시장을 무대로 하는 사업군 내에서의 대형 빅딜임에도 경쟁법적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추진된 탓에 예견된 사태라는 주장도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 기업 간 합병 심사 업무를 맡았던 ㄱ씨(현 변호사)는 6일 “외국 시장과 관련된 대형 기업을 합병할 땐 외국 경쟁당국 리스크를 고려해야 하는데, 산업은행 주도의 빅딜에선 이런 부분을 면밀하게 체크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어왔다”고 말했다. 앞서 무산된 현대중공업(현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의 합병, 그리고 현재 추진 중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간의 합병에 대한 견해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산은이 2019년 1월 발표한 대우조선과 현대중공업 합병은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건조 시장의 독과점을 우려한 유럽연합 경쟁당국의 반대로 합병 추진 3년만에
무산된 바 있다. 국내 양대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합병은 지난해 2월 공정위로부터 조건부
승인을 받았으나 유럽연합·미국·일본 등 3곳 경쟁당국의 승인은 아직 받지 못한 상태다. 최근 아시아나항공 이사회는 유럽 당국의 요구를 수용해 화물사업 분리 매각 방침을 확정한 바 있다.
공정위 출신으로 로펌 고문을 맡고 있는 경쟁법 전문가 ㄴ씨는 “2010년 공정위가 국내외 21개 항공사를 화물담합으로
제재한 적이 있는데, 국내 1, 2위 사업자가 합병하면 화물사업에서 경쟁제한 이슈가 당연히 발생한다고 봐야 한다”며 “산은이나 청와대가 금호아시아나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화물사업 부분의 경쟁제한 이슈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기업에서 수차례 기업결합 업무를 담당한 로펌 고문인 ㄷ씨는 정부의 구조조정 논의과정에 공정위 의견이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라는 점을 짚었다. 그는 “공정위가 정부 부처 내에서 서열로 따지면 힘이 많이 부족하다”며 “공정위의 독립성과 위상을 따져봤을 때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금융위원회 쪽이 구조조정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공정위가 경쟁법 리스크를 강하게 주장하기 어렵거나 그 주장이 먹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위 상임위원을 지낸 신영호 교수(중앙대 경제학)도 비슷한 시각을 드러냈다. 신 교수는 “이론적으로는 공정위가 두 항공사의 기업결합을 승인하면 안된다는 쪽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며 “(그러나)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공정위도 행정 기관이기 때문에 법 논리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 경제적인 요인까지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 고위직을 지낸 ㄴ씨는 “대한항공 자체 판단으로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다며 기업결합을 신고했다면 100% 불허가 났을 사안”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나도 두 항공사 기업결합을 심사하는 입장이었으면 (정부 차원에서) 미리 결정된 걸 목숨 걸고 반대할 용기가 없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공정위가 금융당국의 스탠스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기업결합 심사에 나섰어야 했다는 의견도 나왔다. 공정위 출신 경쟁법 학자인 ㄹ교수는 “공정위가 내건 기업결합의 조건은 두 항공사가 힘들게 확보한 노선을 공짜로 외국에 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호영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장도 “금융당국과 경쟁당국이 각자의 역할을 하며 견제하면 되는 것”이라며 “공정위 심사결과만 보면 우리 국익을 충실히 보호했는지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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