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사장 서른 잔치를 접다
서울대 총학생 회장, 전대협 임시의장, 수배, 서른살의 창업, 서른아홉의 부도….
운동권 출신 386세대 사업가의 선두주자로 주목받았던 이철상(39) 브이케이 사장이 거듭된 경영난으로 7일 최종부도를 맞았다. 20대를 학생운동과 재야단체 활동으로 보냈던 이 사장은 서른 문턱에 사업가로 변신해 큰 성공을 거둔 벤처기업인이었다. 그는 1997년 9월 가족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1억여원을 기반으로 휴대전화 배터리 사업에 뛰어들었다. 운동권 동료들이 힘을 보탰고, 서울공대 출신 선후배도 아이티 벤처 신화에 가세했다.
‘바이어블 코리아’란 이름의 이 회사는 삼성전자에 납품을 하며 한동안 잘 나갔다. 중국 제품의 덤핑 공세로 위기를 맞았을 때도 이 사장은 과감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2001년 주력 사업을 휴대전화 배터리에서 유럽식(GSM) 휴대전화 생산으로 돌렸다. 2002년에는 부도난 중국 휴대전화 업체 ‘샤먼 차브리지’를 인수해 눈부신 성장의 계기를 만들었다. 회사 이름도 이때 ‘브이케이’로 바꿨다. 주문자상표부착제조방식(OEM)에 그치던 다른 중견업체들과 달리 자체 브랜드로 중국 시장을 공략한 게 먹혀들었다. 전지현, 송혜교, 안재욱 등 한류 스타를 활용한 마케팅은 중국 소비자의 마음을 녹였다. 2003년 이후 세계 휴대전화 업계가 글로벌 강자 위주로 재편되면서 세원텔레콤 등 국내 중견업체들이 줄줄이 쓰러졌지만 브이케이는 성장을 거듭했고 2004년에는 매출 3800억원, 영업이익 230억원이라는 화려한 실적을 거뒀다.
하지만 휴대전화 업계 전반의 위기는 이 사장의 성공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노키아, 모토로라 등 거대 글로벌 기업들이 저가폰 시장을 공략 대상으로 삼으면서 채산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브이케이 관계자는 “환율하락, 내수시장의 침체가 직격탄이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지난해 프랑스 회사 웨이브컴의 칩 사업부문을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지만 1년 동안 600억원대의 손실을 보면서 결국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됐다. 이 사장은 이날 “브이케이 경영권 및 주식을 모두 채권단에 일임하고 브이케이를 조기 정상화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며 백의종군 의사를 밝혔다. 브이케이 관계자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법정관리 준비가 늦어졌다”며 “내부적으로 법정관리 절차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한편 증권선물거래소는 이날 브이케이를 상장 폐지한다고 공시했다. 브이케이는 오는 12일부터 21일까지 정리매매를 거쳐 22일 상장폐지된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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