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서점이 대형서점과 온라인 판매업체의 공세로 위기에 처해있다. 서울 영등포 신길삼거리에 있는 신동아문고의 모습. 책 뿐만 아니라 문구류, 담배, 복권 등까지 함께 판매하고 있다.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골리앗 서점 들어오면 끝장”
“대기업 주유소 막아주세요”
중소상인 사업조정 신청 건수·업종 급증
‘일시정지’ 권고에도 점포 여는 대기업도
“대기업 주유소 막아주세요”
중소상인 사업조정 신청 건수·업종 급증
‘일시정지’ 권고에도 점포 여는 대기업도
지난 17일 찾아간 서울 영등포구 신길역 부근의 신동아문고. 100㎡(30평) 남짓한 매장 안에선 간간이 프린터 잉크를 충전하거나 필기도구를 사려는 손님들만 눈에 띄었다. 매장 안의 판매 품목도 3분의 1가량은 문구류로 채워져 있었다. 36년째 이곳에서 책을 팔아온 양명준(61) 사장은 “주변에 대형서점들이 들어선 이후 매출이 40% 이상 떨어져 문구 판매를 늘리기 시작했다”며 “가격 경쟁에서 한참 밀리는 동네 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달께 영등포역 타임스퀘어 쇼핑몰에 들어설 초대형 규모의 교보문고(8250㎡·2500평) 입점 소식은 주변 서점들을 더 옥죄고 있다. 영등포역 바로 앞에 위치한 지에스문고의 황영분 실장은 “반경 4㎞ 안의 동네 서점들은 모조리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전국의 중소형 서점 수는 2007년 기준으로 2042개로 1998년 4897개에 견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서울시서점조합은 지난달 30일 중소기업중앙회에 사업조정 신청을 냈지만 교보문고가 예정대로 입점을 강행할 것으로 보여 애를 태우고 있다.
■ 사업조정 신청 업종 확산일로 제2의 ‘기업형 슈퍼마켓’(SSM) 분쟁이 서점과 주유소, 레미콘, 의류 유통 등 다양한 업종에서 잇따라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 상인들의 다툼을 해소할 근본적 해결책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갈등만 커지는 형국이다.
19일 중소기업청 집계를 보면,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을 막아 달라는 중소 상인들의 사업조정 신청 건수는 모두 54건(반려 3건 포함)에 이른다. 조정 신청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12개 지역으로 번졌다. ‘기업형 슈퍼마켓’에 국한돼온 조정 대상 업종도 서점과 주유소, 레미콘, 마트 등 모두 5개로 늘어났다.
한국주유소협회 군산시지부가 지난 17일 군산시 경암동의 이마트 주유소를 상대로 사업조정 신청을 낸 것을 시작으로 자영 주유소들의 ‘반격’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올 초 들어설 예정이었던 이마트 주유소는 군산시가 인근 주유소의 피해를 우려해 12월까지 개점을 유예한 상태다. 대형 의류유통업체의 입점을 둘러싼 갈등도 예상된다. 광주광역시 소매 의류상인들의 모임인 광주의류판매연합회는 다음달 문을 여는 롯데 아웃렛 광주수완점의 입점 저지를 위해 조만간 사업조정 신청을 내기로 했다.
대기업의 안경업계 진출을 막으려는 중소 안경점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지난 10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안경업소 진입규제 개선을 주제로 한 공청회를 열 계획이었다. 신영선 공정거래위 시장구조개선정책관은 “진입 규제를 완화하면 신규 사업자의 진입이 촉진되고 소비자 후생이 증진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한안경사협회 소속 회원들이 회의장을 점거하면서 공청회는 아예 무산됐다. 이·미용업이나 자동차렌탈업 진입규제 개선 논의도 원천 봉쇄됐다.
■ 조정 기능 ‘먹통’ 갈등 키워 대기업과 중소 상인들이 상생의 해법을 찾기는커녕 갈등을 키우고 있는 것은 이렇다 할 조정 기능이 작동되고 있지 못한 탓이 크다. 중소 상인들이 유일하게 기대고 있는 사업조정 제도는 벌써부터 실효성 논란에 휩싸였다. 중소상인살리기 전국네트워크 신규철 집행위원장은 “중소기업청에서 시·도 지사로 사업조정 권한이 넘어가면서 일시정지 권고가 내려진 뒤에도 영업을 강행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대기업은 영업이 개시된 점포에 대해선 사업조정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비밀리에 점포 개설을 추진하고 있다.
갈등의 진원지인 ‘기업형 슈퍼마켓’ 분쟁을 풀기 위한 상생방안 논의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대형 유통업체가 회원사로 있는 한국체인스토어협회와 전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는 지난 4일 상생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지만, 보름이 넘도록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수퍼연합회는 기업형 슈퍼마켓 개점 허가제 도입, 영업시간 단축, 판매품목 제한 등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체인스토어협회는 개점 등록제 도입, 직영 체제에서 프랜차이즈 체제로의 전환 등을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국회에서 논의될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으로 갈등을 풀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원종문 남서울대 교수(국제경영학부)는 “정부·여당이 등록제 전환으로 가닥을 잡고 있지만, 대형마트의 무분별한 출점에서 보는 것처럼 현행 등록요건으로는 사실상 규제가 어려울 것”이라며 “엄격한 지역경제 영향평가 등이 수반되지 않으면 생색내기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경우 대형점과 중소 소매점의 경쟁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인구 4만명 미만의 지역에선 점포 면적 2000㎡ 이상 또는 매장 면적 1000㎡ 이상으로 증설하는 경우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황보연 이정연 기자 whynot@hani.co.kr
전체 사업조정 신청 접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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