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조정협의회에 당사자 배제하라’ 뒤늦게 지침
“갈등 첨예해지고 합의 도출 어려워” 이유
지자체 “합의엔 당사자 의견 우선” 난감
“갈등 첨예해지고 합의 도출 어려워” 이유
지자체 “합의엔 당사자 의견 우선” 난감
‘기업형 슈퍼마켓’(SSM) 분쟁을 1차적으로 조정할 광역시·도 ‘사전조정협의회’ 구성을 두고 중소기업청이 ‘오락가락’ 지침을 내려 혼란을 키우고 있다. 중앙정부가 풀어야 할 골목상권 붕괴 문제를 지방자치단체에 떠넘긴 것도 문제지만, 그나마 자치단체가 중재 구실을 맡도록 할 정책적 뒷받침마저 부실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중기청은 지난 18일 일선 시·도에 ‘사전조정협의회를 구성할 때, 신청인과 피신청인을 위원에서 제외하라’는 내용의 지침을 내려보냈다. 예컨대 인천수퍼마켓협동조합이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슈퍼를 상대로 입점 철회 사업조정 신청을 냈다면, 두 당사자는 협의회 위원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중기청은 지난 5일 관련 고시를 개정해 시·도지사가 10명 이내의 협의회를 구성해 슈퍼 분쟁의 1차 합의를 시도하도록 했다. 하지만 개정 고시는 협의회 구성 방식에는 별다른 원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중기청이 뒤늦게 당사자 배제 지침을 내놓자 지자체들은 혼란에 빠지는 모습이다. 대전시 관계자는 “중기청이 지난 4일 지자체 담당자를 불러 교육할 땐, 신청인과 피신청인을 협의회에 포함하란 취지로 얘기했다”며 “지침이 바뀌는 통에 수퍼마켓협동조합을 협의회에 넣었다가 다시 뺐다”고 말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사업조정 신청이 나온 인천시도 애초엔 이해 당사자를 포함한 협의회를 꾸렸다. 인천시는 당사자를 뺀 나머지 위원을 일방적으로 위촉했다가 중소상인단체가 ‘조정 불참 선언’을 하는 진통을 겪고, 이를 철회한 상태다. (<한겨레> 17일치 2면 참조) 인천시는 이런 홍역을 겪은데다 중기청이 이해 당사자 배제 지침을 내리자 당황스럽다는 반응이다. 인천시의 한 관계자는 “합의를 하려면 당사자 의견이 우선인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며 “정부와 국회가 풀 문제를 지자체에 떠넘겨 난감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울산시 쪽도 “처음엔 당사자에게 위원 위촉을 타진했는데, 지침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시·도 사전조정협의회는 첫 단계 조정을 통해 합의안을 만드는 게 목적이지만, 여기에 실패해도 2차 조정 단계인 중기청 사업조정심의회에 조정의견 등을 내도록 돼 있다. 중소상인단체와 시민단체들은 ‘전문가’나 ‘관계 기관’이란 이름으로 편파적이거나 무기력한 협의회가 꾸려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류붕걸 중기청 기업협력과장은 “당사자가 사전조정협의회에 들어가면 갈등만 첨예해지고 합의안이 나오기 어려워, 중립적 인사들이 조정안을 만들고 양쪽 당사자를 설득하라는 취지로 당사자를 빼도록 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산업정책을 통해 풀어야 할 문제를 지자체에 넘기며 뒷짐을 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국회와 중소상인들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수정 양허안 제출과 대규모 점포 개설의 허가제 도입 등 근본 대책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실효성 논란이 큰 ‘기업형 슈퍼 등록제’를 제안한 게 전부다. ‘대형마트 규제와 소상공인 살리기 인천대책위’의 정재식 사무국장은 “정부는 대기업 위주 유통선진화를 내세워 골목상권 붕괴를 방치하고, 지자체들은 재개발 사업을 통해 끊임없이 대형 유통점포를 짓는 식으로 중소상인의 생존권을 옥죄어왔다”며 “임시처방인 사업조정 제도에 문제를 떠맡길 게 아니라 근본적 정책 변화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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