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열려라 경제]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아이티의 지진 참상을 보면 “화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禍不單行)는 말이 생각난다. ‘높은 산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아이티는 흑인 노예들의 반란으로 독립을 쟁취한 남미 최초의 독립국이다. 인구는 천만명인데, 대부분이 흑인이다. 1인당 소득은 790달러로서 세계 최빈국에 속한다. 문맹률이 50%이고, 빈곤층이 80%나 된다. 수도의 빈민가는 유엔(UN)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명명할 정도다. 부패가 심하고 소득분배도 불평등하다. 콜럼버스는 1492년 아이티에 상륙한 뒤 이 나라를 ‘에스파뇰라’로 명명하면서 스페인 영토라고 선언했다. 콜럼버스는 칼을 처음 보는 순박한 원주민들을 200명의 군대와 개를 보내서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이 섬을 점령했다. 콜럼버스와 스페인의 목표는 오직 금이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에 묻어온 전염병 때문에 거의 멸종됐고, 정복자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끌고 와 금 채굴에 나섰다. 스페인 다음에는 프랑스 해적들이 이 지역에서 담배와 설탕 재배로 큰 이문을 남겼다. 당시 설탕은 ‘흰 금’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아이티의 토지제도는 설탕, 커피 재배를 위해 ‘라티푼디움’이라는 대토지 제도로 재편됐고, 이것이 극심한 불평등과 저개발의 원인이다. 지금도 아이티는 최고 부자 1%가 부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부의 분배가 불평등하다. 프랑스혁명 이후 인권 사상이 고양되면서 아이티에도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아이티 독립운동의 진압 책임자는 나폴레옹의 매제였던 샤를 르클레르였는데 동원된 프랑스군 5만명이 황열병에 걸려 죽었고, 르클레르도 황열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원주민의 피해는 더 커서 10만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아이티인들은 기어코 1804년 독립을 선언했고, 프랑스 정부는 1825년에 가서야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독립을 승인했다. 독립 후에도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의 군사적, 경제적 개입은 계속됐다. 미국은 해병대를 보내 아이티의 군사반란에 가담했고, 1915년에서 1934년까지는 직접 점령하기도 했다. 아이티는 독립 200년 동안 쿠데타가 무려 32회나 발생할 정도로 정정이 불안하다. 1957년부터 30년간 뒤발리에라는 부패하고 무도한 독재자가 2대에 걸쳐 이 나라를 폭압적으로 지배했는데, 미국은 뒤발리에 정권을 지원, 방조했다. 칼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사 여러분은 커피, 설탕 재배가 서인도제도의 운명이라고 믿겠지요? 그러나 2세기 전 그곳에 사탕수수와 커피를 심은 것은 자연이 아닙니다.” 실제 그곳에 사탕수수를 옮겨 심은 것은 콜럼버스였다. 아이티를 커피, 설탕 생산에 특화시켜 빈곤에 빠뜨린 국제 분업체제는 자연의 섭리가 아니고, 바로 세계 자본주의의 발달에서 온 것이다. 비극의 땅, 아이티에 서광이 비칠 날은 언제일까?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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