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계를 누비며 활동하고 있는 뉴욕의 대형 금융회사들은 미국내 지역재투자법 관련 실적 발표에 해마다 촉각을 곤두세운다. 금융회사들이 몰려 있는 뉴욕 월가. <한겨레> 자료사진.
제1부 해외서 배운다 - 양극화를 넘어 동반성장의 길 ⑨ 미 지역재투자법 지역 저소득층·영세업자 차별막기
대출등 실적평가…모자랄땐 규제
정부·공익단체 ‘위험 분산’ 거들어 2001년 9·11 테러의 상처는 뉴욕시 맨해튼 곳곳에 남아 있다. 테러 현장을 끼고 있는 나솟가에서 네일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여옥구(48)씨에게도 9·11 테러는 현재 진행형이다. 여씨는 198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먹고 살기 위해 안해본 일이 없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해서 모은 돈 30만달러를 털어 넣어 테러참사 5개월 전에 이곳에 네일가게를 차렸다. 그에게 9·11테러는 경제적 살인이나 다름없었다. 테러 이후 수개월동안 가게에는 파리만 날리고 세금이며 관리비만 꼬박꼬박 쌓여갔다. 하지만 여씨와 그의 가게는 지금 거뜬하게 살아 재기를 꿈꾸고 있다. ‘액션’이라는 소액신용대출단체로부터 테러사태 직후 3만달러를 대출받은 것을 비롯해, 골드만삭스 등 유수 은행들로부터 사업유지에 필요한 돈을 제공받고 있기 때문이다. “진솔하게 사정을 적은 에세이 한장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제 때 못갚아도 독촉을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만 하면 그만입니다. 오히려 이자가 싼 다른 대출선을 소개해주거나 경영자문까지 해줍니다. 큰 충격을 받고 나서야 미국이 정말 고마운 나라라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9·11 직격탄’ 한인 상인들
진솔한 에세이 한장 적아내자
인종·경제력 안따지고 거액대출
열심히 일하면 빚독촉도 안해
한국 일부은행 고객차별화
미국이라면 당장 퇴출대상감 ■ 누구나 신용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낫소가에서 한국음식점을 운영하는 교포2세 데니 민(35)씨도 지난 1999년 사업계획서만으로 한 지역은행에서 10만달러를 융자받아 가게를 차렸다. 그는 “대학졸업 후 아메리칸익스프레스에 다니다가 구조조정을 하는 바람에 실직했는데 은행에서 무담보로 사업자금을 대줘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뉴욕 은행들이 소수민족 영세사업자들에게 기꺼이 대출을 해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역재투자법(CRA:Community Reinvestmet Act)’이라는 서민금융제도 때문이다. 미국 의회는 1977년 인종, 종교, 성별, 국적, 경제적 지위 등에 따른 금융차별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로 이 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는 ‘금융업은 신용이 낮은 중·저소득층의 수요에 부응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신용과 자본을 얻는 일을 국민 기본권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저소득층은 지역 내 중간소득의 80% 미만 계층을 말한다. 또 연간 매출 100만달러 이하 영세사업자들도 수혜대상에 포함된다. 지역재투자법에 따라 자산 2억5천만달러가 넘는 모든 미국 은행들은 대출, 투자, 서비스 등 3개 업무영역에서 각각 수십가지 항목의 실적을 일반에 공개해야 한다. 또 연방준비은행(FRB)을 비롯해 예금보험공사(FDIC)), 통화감독청(OCC), 저축은행감청(OTS) 등 금융감독기관에도 보고해야 한다. 감독기관들은 은행들의 보고와 자체 심사결과를 토대로 등급을 매겨 합병, 사업권 취득, 업무영역 확장 등의 신청이 들어올 때 인허가 기준으로 삼는다. 평가등급은 우수, 양호, 미흡, 비준수 등으로 나뉜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양호’ 등급 이상을 받지 못해 합병이나 신규 점포 개설 등을 허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80~90년대에는 해마다 수백건, 2천년대 들어서는 수십건에 이른다고 한다. 뉴욕주 연방준비은행의 캐서린 올드 감독관은 “평가등급이 낮은 은행은 감독기관의 규제도 문제이지만 언론이나 여러 공익기관 및 시민사회단체로부터 강한 질타를 받기 때문에 견디기 어렵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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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발전은 은행 이익의 기반=지역재투자 관련 실적평가와 보고의무는 은행에 큰 짐이다. 본점은 물론 각 지점까지 상세한 등급을 매기려면 두달 이상이 걸릴 정도로 방대한 작업을 해야 한다. 더구나 소득이 낮은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영업이기 때문에 위험부담도 크다. 그럼에도 미국의 주요 은행들은 이 법을 충실하게 따른다. 오히려 지역재투자로 수익기반을 더욱 강화하는 은행들도 적지 않다. 소매금융분야에서 미국 최대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지난해 7월 지역재투자법 관련 대출과 투자에 10년동안 7500억달러(757조원)를 쏟아붓겠다고 발표했다. 또 같은 기간 순수 자선기금으로 15억달러(1조5200억원)를 내놓기로 했다. 수전 레츠키 지역개발담당 수석부장은 “지역을 살리고 서민들이 열심히 일해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것은 은행의 수익기반 안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며 “그래서 지역금융은 ‘좋은 사업’이면서 이익을 내게 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위험관리방식을 묻자 “이 사업에는 정부나 지역의 공익단체 등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저절로 위험은 분산된다”고 설명했다. 즉 지역재투자는 공익목적의 사업을 민간의 자금력과 심사기능, 경영능력을 결합시켜 추진하는 민-관합동전략이라는 얘기이다. ■ 따뜻한 금융의 세계화=미국에서 지역재투자법에 따른 금융이 활발해진 것은, 역설적이게도 금융세계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미 재무부의 추정으로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6년동안 지역재투자법에 따른 가계대출 증가율이 80%에 이른다. 보스톤칼리지 부설 기업시민연구센터의 브래들리 구긴스 소장은 “클린턴 행정부 때 몇가지 법안 강화작업이 이뤄지면서 지역재투자법이 금융회사의 사회책임 기준으로 자리잡았다”고 분석했다. 미국 뉴브릿지캐피탈이 제일은행을 인수한 직후 윌프레드 호리에 초대 행장은 ‘음식점에서 육계장만 먹는 사람과 고기먹는 사람의 차이’를 거론하며 소액예금 이자안주기 등 소득계층에 따른 고객차별화 전략을 선보였다. 한국의 금융당국과 금융회사들은 그게 ‘선진금융기법’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선진금융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이런 금융기법을 구사하다가는 퇴출대상이 된다. “미국 금융회사들이 안방에서는 이웃에게 따뜻한 존재이면서 다른 나라에서는 왜 약탈적 모습을 보이는가”라는 질문에, 구긴스 소장은 “그렇기 때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준을 국제표준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뉴욕·보스턴/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할렘가, 문화·상업 중심지 변신” 크레머 뉴욕주 차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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