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시위는 경제위기의 강도와 시위의 확산 정도에 따라 때로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바꿨고, 때로는 미풍에 그쳤다. 이번 시위는 내용상으로는 1930년대 대공황 때를, 방식으로는 68운동을 닮았다.
1929~33년 대공황 당시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실업률이 20~30%에 이를 정도로 극심한 일자리 부족과 빈곤에 시달렸다. 주요 도시에선 빵을 구하려는 빈민들과 당국을 비난하는 실업자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다.
미국에서조차 시위가 일상화됐다. 시위는 해고가 급증하기 시작한 1930년 초부터 본격화했다. 처음에는 수십명 단위의 식량 약탈이 벌어지다, 점차 전국적 시위로 번졌다. 1932년 워싱턴에서 열린 시위엔 6만여명이 참가해 경찰과 대치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그해 치른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그는 이전 공화당 정부와 달리 대규모 공공개발을 주내용으로 하는 뉴딜정책과 금융규제, 사회보험 도입 등의 정책을 폈다. 대공황과 당시 시위는 미국처럼 민주적 전통이 강한 국가들에선 시장만능주의에서 복지국가로 전환하는 큰 계기가 됐다. 반면, 독일 같은 곳에서는 파시즘이 등장하는 빌미가 됐다.
1970년대 경제위기 때는 노조 파업 등이 벌어졌으나 시위가 일반 대중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이는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이 갖춰진데다 석유파동(오일쇼크)이라는 외부 충격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과 영국에선 ‘큰 정부’가 위기를 초래했다며, 감세와 규제 완화를 핵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했다.
이번 시위는 양상으로 보자면 1960년대 후반 ‘68운동’을 닮았다. 68운동은 청년층에서 시작해 나중에 노조 등이 참여하면서 파괴력이 커졌다. 주장 내용도 베트남전 반대에서부터 대학 개혁, 성평등, 인종차별 금지 등 다양해 목표가 불분명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황금기에 발생한 사건이라 자본주의 체제 변화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68운동>의 저자인 이성재 충북대 교수는 “자발성, 놀이문화적 요소, 국제적 현상 등은 이번 시위와 유사하지만 당시는 권위주의 체제 거부와 베트남전 반대가 중심 이슈였다”고 말했다.
현재 세계적 경제위기는 그 심각성이 70년대보다는 크고 대공황 때보다는 작다. 실업률의 경우 스페인은 대공황에 버금가지만 나머지 국가는 그에 못 미친다. 그러나 소득 불평등은 미국의 경우 대공황 때와 비슷하다. 이번 시위는 앞으로 경제 상황에 따라 확산 정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경제체제 변화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는 “금융규제와 부유세 도입·확대 같은 제도 변화는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그러나 금융자본가들이 채무탕감 같은 상당한 양보를 할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현 기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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