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치킨게임’서 삼성·하이닉스에 밀려 파산
소니·파나소닉·샤프 등 일본 대표기업들도 추락
변화에 대응 못하고 미국식 성과제 도입도 한몫
소니·파나소닉·샤프 등 일본 대표기업들도 추락
변화에 대응 못하고 미국식 성과제 도입도 한몫
일본 엘피다 메모리가 결국 침몰했다. 한때 디(D)램 10개 중 7개에 엘피다 로고가 새겨져 있을 만큼 막강했던 디램 반도체회사의 역사는 저물었다. 엘피다의 도산은 일본 제조업의 몰락을 상징한다. 좌초하는 엘피다를 살리려고 일본 정부와 업계가 대규모 자금 수혈 등에 발벗고 나섰던 것도 그래서다. 엘피다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공세에 무너진 셈이다.
■ 치킨게임의 종언? 28일 하이닉스반도체 주가는 6.8% 급등했다. 삼성전자 역시 1.2% 상승 마감했다. 전날 엘피다의 법정관리신청 소식이 증시에 반영된 것이다. ‘적이 망해야 살 수 있는’ 반도체 시장의 치열한 경쟁에 대한 방증이다. 송종호 대우증권 연구원은 “엘피다의 파산보호 신청은 순수 메모리 업체인 하이닉스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클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엘피다가 고꾸라진 건 반도체 업계의 오랜 ‘치킨게임’의 결과다. 가격을 원가 이하로 낮출 만큼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결국 약한 쪽이 나자빠진 것이다. 삼성전자·하이닉스·엘피다 등 3강의 피 터지는 싸움으로 이미 독일의 키몬다가 2009년 파산하는 등 반도체시장의 구조조정은 몇년 전부터 진행돼 왔다. 삼성전자·하이닉스·엘피다가 세계시장 점유율 80% 정도를 나눠갖다가 엘피다가 사라짐으로써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시장 지배력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심지어 두 업체가 80%에 가깝게 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는 예상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그동안 완만한 상승세를 보여온 피시(PC)용 디램 값의 상승폭이 더욱 커지고, 모바일 디램의 경우 가격 하락폭이 대폭 둔화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는 업황 악화로 대부분 디램 업체들이 적자에 허덕여왔다. 지난해 4분기 유일하게 흑자를 낸 삼성전자, 지난해 4분기까지 2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지만 연간 흑자를 유지한 하이닉스를 제외하면, 미국 마이크론은 지난해 4분기 100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봤고, 대만의 난야는 지난해까지 8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의 두 강자에 맞서기 위해 엘피다·마이크론·난야가 경영 통합에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엘피다는 주저앉아버렸다.
■ 일본 제조업의 사망선고? 일본은 충격에 빠졌다. 엘피다의 도산 때문만은 아니다. 엘피다가 상징하는 일본 제조업의 오늘에 암울해 하는 것이다. <요미우리신문>은 28일 “1980년까지 일본을 상징한 대표적 산업이었던 반도체산업을 신흥국에게 내주고 말았다”고 분석했다. 원인으로는 엔고와 시황 판단의 오류 등을 꼽았다. 1995년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윈도우 95를 개발한 뒤 삼성전자 등 한국 업체들은 공격적으로 투자를 늘렸지만, 일본 업체들은 가격 하락을 우려해 오히려 투자를 줄였다는 것이다. 뒤늦게 일본 업체들은 한국을 따라잡기 위해 투자를 늘렸지만, 기술 개발에서 뒤처지는 ‘악순환’에 빠져들게 됐다. <아사히신문>도 “일본의 제조업을 지탱해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산업의 중핵이 일본에서 사라질 위험에 놓였다”고 우려했다.
엘피다뿐 아니라 소니, 파나소닉, 샤프, 파이오니아 등 1980~90년대 승승장구했던 일본 기업들은 맥이 빠져버렸다. 일본 제조업의 영업이익률은 1960년대 7.5%에서 1990년대 들어 3%대로 떨어졌고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엔 1%대로 추락했다. 오는 3월 결산에서 소니, 파나소닉, 샤프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엘지(LG)경제연구원은 최근 ‘일본 기업의 실패와 성공의 교훈’이란 보고서에서 일본 기업들의 몰락 이유를 1990~2000년대 디지털화·개방화·소프트화의 흐름에 뒤처진 데서 찾았다. 실제로 가전제품이 빠른 속도로 변화할 때 일본 기업들은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실현이 어려운 기술 과제에만 매달리는 경향을 보였다.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미국식 연봉제를 돌파구로 도입한 것도 커다란 패착으로 꼽힌다. 평생직장의 공동체 의식이 강한 일본 기업이 돌연 성과주의 인사제도를 들여오자 불필요한 마찰이 생겼고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는 것이다.
이지평 엘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1990년대 일본 기업과 현재 우리가 비슷한 상황”이라며 “일시적으로 참고 견디기 위해 비용 절감이라는 통상적인 불황 대처에만 그칠 경우 실패한 일본 기업처럼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진철 길윤형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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