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기마저 느껴지던 나라살림 걱정
총선 이후 예산안 편성원칙에선 안 보여
총선 이후 예산안 편성원칙에선 안 보여
법적, 정치적 무리수까지 두면서 정치권의 복지공약 ‘감별’에 나섰던 기획재정부가 4·11총선 이후 공세 수준을 낮췄다. 재정부는 24일 내년도 예산안 편성지침을 발표했다. 그런데 총선 전 정치권의 복지공약 검증 및 발표 때 보였던 긴박감과 결기는 ‘다행히’ 찾기 어렵다.
재정부는 총선을 1주일 앞둔 지난 4일 김동연 2차관을 팀장으로 하는 복지태스크포스(TF) 3차 회의를 개최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요지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총선 공약으로 확정한 복지 관련 266개 총선공약을 모두 실행한다고 가정할 경우 앞으로 5년간 최소 268조원의 예산이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김동연 차관은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복지공약들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고 복지공약을 총평했다.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연기 요청과 선거법 위반 경고도 무시했다. 재정부 나름대로 복지공약 검증과 그것을 알리는 일이 시급했던 사안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하는 시선들에 대해선 “총선에 영향을 주거나 특정 정당에 유불리하도록 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김동연 차관)고 말했다. ‘나라 곳간 지킴이’가 아무런 정치적 의도 없이 나라살림 걱정 때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결기마저 느껴졌다.
재정부의 이런 태도는 정작 총선 이후 예산안 편성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83쪽에 이르는 예산안 편성지침에 정치권의 ‘복지 포퓰리즘’을 경계하는 문구를 찾아볼 수 없다. 지침의 재정운용 여건을 다루는 부분에서 “다양한 복지욕구 표출, 자치단체의 지방재정 확충 요구 등은 잠재적·대규모 재정소요 증가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언급을 딱 한 줄 했을 뿐이다. 보도자료에도 정치권을 향해 평소 즐겨쓰던 복지 포퓰리즘이란 표현을 넣지 않았다.
예산안 편성지침을 설명하는 브리핑자리에선 불과 20여일 전에 비해 크게 누그러진 태도까지 보였다. 정치권의 복지 확대 요구를 포퓰리즘으로 치부하며 이를 수용하면 나라 살림이 거덜난다고 누누히 강조해온 재정부가 정작 예산안 편성의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면서는 극도로 말을 아낀 것이다. 김동연 차관은 기자들과 질의응답 과정에서 “정치권과 국회에서 요구하는 복지와 관련된 내용중에서 정부(의 일자리 복지, 맞춤형 복지)와 부합된 부분은 적극적으로 함께 논의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예산편성에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정당간 이견은 국회에서 협의해 조율하겠다는 합리적인 태도였다. “일부 정부 방향과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선 예산심의 과정이나 국회 협의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가 있을 것으로 본다.” 정부가 예산안을 편성해 9월 말까지 국회에 제출하면 이후 국회에서 심의·의결이 이뤄지는 법적 절차를 설명한 것이다.
재정부는 왜 처음부터 정치권의 복지공약에 이런 태도를 갖지 않았을까? 정부 스스로 이제 와서 얘기하는 것처럼 여야 정당의 복지공약과 그 약속 이행에 따르는 예산 소요는 9월 이후 예산국회 때 논의하면 된다. 필요하면 이견 조율을 위해 사전에라도 각 정당과 협의하면 충분하다.
정부는 이를 빤히 알면서도 선거 직전 고집스럽게 선거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복지 감별사’로 나선 것은 ‘정치적 의도가 숨겨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해석을 낳았다.
여야 각 정당의 총선 공약, 국회의원 후보의 공약 그리고 대통령 후보의 공약이 100% 실제 실행단계로 이어지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그 가능성을 따져 공약이 빈말인지 아닌지 살펴보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만, 그건 선거에 중립적이어야 할 공무원과 행정부의 몫이 아니라 국민과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정치권의 몫이다. 우리사회가 법과 상식에서 정한 이 기준선을 넘은 재정부의 행동은 선관위의 공직선거법 위반 결정으로 귀결됐다.
재정부 관계자는 “다음달 4차 복지티에프 회의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예고했던 대로 매달 한 번씩 열겠다는 것이다. 이번엔 2차 회의 때처럼 복지 전달체계 점검 등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라고 한다.
서복경 서강대 교수는 “정부가 국회 안에서 예산과 관련해 충분히 협의 및 논의할 공간이 열려 있다”며 “그런데도 선거 국면에 선관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지공약 검증 결과 발표를 강행한 것은 문제였다”고 말했다.
재정부가 19대 국회 및 여야가 밝힌 총선 공약을 재검증해 발표하고, 대선 후보들의 공약도 점검하겠다고 다시 나설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곳간 지킴이 행동에 대한 신뢰와 그 순수성을 믿어줄 사람은 이미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재정부가 결코 독재정권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정치권의 허황된 선심성 공약 남발에 강력한 제동을 걸겠다’면서, 여당이 선거공약을 할 때 반드시 예산당국의 사전검토를 받게 했다. 행정부가 입법부를 장악했던 민주화 이전 암울했던 시대의 역사였다.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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