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MS·사모펀드 손잡고 인수
‘비상장’ 전환 PC탈피 공격경영 시사
클라우드 서비스·기업용 SW 승부수
‘비상장’ 전환 PC탈피 공격경영 시사
클라우드 서비스·기업용 SW 승부수
델이 델을 결국 다시 손에 넣었다. 2007년 델의 최고경영자(CEO)로 복귀한 창업자 마이클 델이 5일(현지시각) 사재를 털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을 받는 한편 사모펀드와도 손잡고 델을 인수하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델이 델을 창업한 때는 거의 30년 전인 1984년. 미국 텍사스대 생물학도였던 19살짜리 델은 피시(PC) 메모리 업그레이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직접 피시 조립에 나서며 회사를 세웠다. 가파르게 성장한 델은 4년 만에 상장까지 마쳤고, 1990년대 피시 시장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제왕에게도 어려움은 닥쳐왔다. 저가 전략의 한계, 경영 능력의 부족이 겹쳤다. 1996년 베인앤컴퍼니 부사장인 케빈 롤린스와 공동 경영에 나섰고, 2004년 델은 경영권과 함께 최고경영자 자리를 롤린스에게 넘겼다. 피시 시장 1위를 빼앗긴 직후인 2007년 델은 다시 최고경영자로 복귀했고, 이번엔 전격 인수 카드를 내놨다. 차입인수거래(LBO) 방식으로 244억달러(26조6000억원)에 거래가 성사됐다. 엘비오 방식의 기업인수 규모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최대 다. 엘비오란 우호세력으로부터 돈을 빌려 인수하는 방식이다.
‘피시업계의 자존심’으로 통해온 델의 비상장 전환은 위기 상황에서 선택한 모험이다. 1996년 온라인 판매로 하루 100만달러 이상 벌어들이고, 2001년까지만 해도 하루 매출이 4000만달러에 이르렀지만, 이후 경쟁사가 비용 절감을 통해 반격하고 소비자들도 디자인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휴렛팩커드(HP)와 애플 등에 고객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2006년 말엔 세계 1위 자리까지 내줬고, 최근 들어선 레노버·에이서·아수스 등 중국·대만업체에까지 밀렸다.
막강한 경쟁자의 등장과 더불어 더욱 큰 위기는 시장 자체에서 왔다. 스마트폰·태블릿피시(PC) 등 모바일 기기가 득세하면서 피시 시장은 저물어갔다. 세계 피시 출하량은 2011년 4분기 9500만대에서 지난해 4분기 9037만대로 4.9% 축소됐다. 델의 시장점유율은 같은 기간 12%에서 10%로 떨어졌다.
마이클 델은 “이번 거래가 델과 고객들에게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 것”이라고 말했지만, 앞날은 험난해 보인다. 경쟁사인 휴렛팩커드는 델의 거래 발표 직후 “회사가 장기간 불확실성에 휩싸이게 됐고, 고객들에게도 긍정적이지 않다”는 내용의 이례적인 성명을 냈다. 무엇보다 모바일 기기가 주류가 된 상황에서 델이 과연 시장을 되찾을 수 있느냐는 데 회의적인 목소리가 적지 않다. 델을 추월한 레노버 등 기존 피시업체들 역시 애플이 장악하고 삼성전자 등이 치고 올라오는 태블릿피시 시장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아직까지 결과는 신통찮다. 델은 2007년 최고경영자로 복귀할 때 “지금이 (창업하던) 1984년처럼,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장담했지만, 같은 해 아이폰이 혜성처럼 등장했고 피시 시장의 몰락은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비상장 포석’에서 강한 혁신 의지가 읽히긴 한다. 여러 주주들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신속한 경영 판단이 어렵고 단기실적을 중시할 수 밖에 없는 ‘상장의 굴레’를 벗어던진 것이다. 이를 통해 발빠른 의사결정과 공격적인 혁신으로 디지털 환경의 급변에 발맞추려는 뜻이다. 델은 “대형업체에 소프트웨어 제공 서비스를 확대하는 전략으로 입지를 굳힐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델을 지원하고 나선 것도 주목된다. 델이 이번 거래에서 자신의 주식과 현금 45억달러를 내놓았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20억달러를 대출해주기로 했다. 시장에선 델이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클라우드 사업에 집중하는 한편 기업용 시장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리서치회사인 포레스터의 데이브 존슨 애널리스트는 “델이 최근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인수하고 이번에 마이크로소프트와 손 잡은 것은 피시 의존도를 낮추려는 것이다. 둘은 생각보다 강력한 조합이 될 수 있고, 시장 판도를 바꿀 잠재력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서피스 등 여러 제품군을 가진 마이크로소프트가 델의 부활에 도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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