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비판이 부메랑될 처지…이젠 언행일치 보여줄 때
두산그룹 회장이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인 박용성씨는 ‘미스터 쓴소리’로 불린다. 재계인사들이 대체로 입이 무겁고 말을 아끼며 선문답을 즐기는 것과 달리, 정치권은 물론 재계 내부에 대고도 직설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날리는 그에게 호사가들이 붙인 ‘애칭’이다. 그를 ‘기인’으로 보는 것은 그의 일면만을 보는 것이며, 그를 ‘참기업인’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애칭의 의미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적어도 애칭을 붙인 사람들의 의도는 그랬을 것이다.
그의 발언 가운데는 드물지 않게 강남사람들의 속을 긁는 얘기도 있다. 얼마전에는 “집값을 잡으려면 부동산에 대한 반시장적 규제들을 없애되 현행 0.15%인 보유세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들 평균인 1%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땅부자와 집부자들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부동산 보유세 강화론’을 편 것이다. 그의 애칭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발언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읍참마속 해야 무릇 ‘쓴소리’
쓴소리는 본디 말하는 자의 ‘올바름’이 전제돼야 힘을 받으며, 말하는 자가 ‘읍참마속’의 아픔을 감내할 때 큰 울림을 낳는 법이다. 땅이든 집이든 남부럽지 않게 가졌을 재벌 회장이자 경제단체 회장이 부동산 보유세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또 있을까. 자신도 기꺼이 세금을 낼테니 강남사람들도 뒤를 따르라고 하는 멸사봉공의 희생정신 앞에서 “반시장적 규제들을 없애되”라는 단서는 꼼수라기보다는, 시장주의자의 확고한 신념으로 비친다.
지난해 12월 제45대 국제상업회의소(ICC) 회장에 당선된 직후 연 기자회견에서 그는 “우리나라의 재벌 제도가 전세계에 없는 제도라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밝히는가 하면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다해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지위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이전에도 “그룹을 개인 회사처럼 생각하고, 특히 능력없는 자식에게 회사를 넘겨주려는 경향이 큰 문제”라는 쓴소리로 동료 재벌총수들의 철판 가슴을 긁곤 했다.
“그룹을 개인회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문제”라고?
그의 쓴소리 안에는 족벌의 재벌기업 지배에 대한 문제의식이 절절히 담겨 있는 듯하다. 2003년엔 “현 정부를 친노동 정권이라고 비판만 하지 말고, 현재 추진 중인 경제정책을 믿어야 한다”며 재계의 ‘일반정서’를 거스르고 노무현 정부를 두둔하는가 하면, “이제 기업도 투명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투명성 문제는 생존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그이기에 지난 3월 ‘투명사회 협약’ 체결식이 열린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다른 기업 총수나 경제단체장들 사이에 선 그의 모습은 우뚝해보였다.
두산그룹이 지난 8일 두산산업개발의 7년에 걸친 2800억원대 분식회계 사실을 자진공시했을 때 시장의 충격은 뜻밖에도 그리 크지 않았다. 증시 분석가들은 “중장기적으로 투명경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고, 두산 관련 주가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박용성 회장이 7월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분식회계 내역을 보고받고 즉시 공개를 지시했다”는 두산 쪽 해명은 그저 뱀발이었다. 오히려 그가 분식회계에 직접 개입했을 것이라는 의혹만 높였을 뿐이다. 두산은 쓸데없는 일로 긁어부스럼을 만든 셈이다. 그런 해명이 없어도 박 회장은 부동의 ‘미스터 쓴소리’다.
부당내부거래에 부당노동행위를 하면서도 쓴소리는 계속
물론, 그의 쓴소리를 떠받치는 올바름과 희생정신을 의심케 하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두산중공업의 소액주주들이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를 통해 회사에 517억원의 손실을 입혔다며 2003년에 그를 배임죄로 고소한 일이 있었다. 517억원이면 결코 적은 돈은 아니다. 또, 그가 두산중공업 임원간담회에서 “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노사문화를 정립해야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며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니 총알(돈)을 추가보급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적힌 간부수첩 메모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다.
그러나 쓴소리는 말하는 자의 입에도 써야 진정한 쓴소리가 아니겠는가. 남의 입에만 쓴 그런 쓴소리라면 누가 못할까. “이제 기업도 투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박 회장은 자신에게도 아플 수밖에 없는 쓴소리를 두려움없이 날렸기에 진정한 ‘미스터 쓴소리’인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박 회장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했지, “죽음으로써 떠나게 하라”고 ‘머슴들’에게 지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니 총알을 추가보급하라”는 지시에서는, 필요한 최소한의 희생을 선택할 줄 아는 탁월한 야전사령관의 쓰디쓴 냉철함이 읽힌다.
“첨단기술 좋아말라”더니 바이오기업에 밑빠진 투자
박 회장의 쓴소리는 관행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2002년 “한국 기업은 첨단기술을 좋아하는 첨단병을 앓고 있다. 누가 좋다고 하면 충분한 검토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시장을 어지럽히는 들쥐떼 근성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첨단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한국사회, 아니 지구촌 차원의 신화에 그가 아니면 어느 누가 정면으로 맞서 그런 쓴소리를 날릴 수 있겠는가. 재벌지배구조에 나름대로 쓴소리를 날린다는 경제학자들도 상상하지 못할 쓴소리가 아닐 수 없다.
두산이 지난 2001년 자산가치 70억원짜리인 미국의 NPI라는 바이오 기업을 인수해 지금까지 870억원을 쏟아붓고도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한 것을 두고 외화 밀반출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지만, 박 회장은 딱 부러진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외화 밀반출 의혹에 대한 해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작 자신은 밑빠진 독에 물붓듯 바이오 기업에 돈을 쏟아부어놓고 남들에게 ‘들쥐떼’ 운운할 수 있느냐는 곱지 않은 눈길 앞에서 이젠 뭐라 한마디 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급하게 다그치지 말자. 그에게도 시간은 필요하다. 지금은 다른 일로 공사다망 하다보니 겨를이 없을 뿐, 머잖아 상대의 허를 찌르는 쓴소리를 내놓게 될 것이다. 섣불리 뻔한 상상을 해서도 안 된다. 적어도 그는 “바이오 기업은 절대 첨단산업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에 그의 쓴소리는 대부분 위치한다. 섣불리 상상할 수 없으니, 오로지 참을인자를 새기며 기다리는 게 능사다.
두산, ‘패밀리 비즈니스’ 척결할 호기
물론, 지금 박 회장이 다소 어려운 처지에 있는 건 사실이다. 17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형과 조카들의 검찰 진정과, 총수일가의 경영권 방어와 세습을 위해 회사가 지급보증을 서게 해 은행대출을 받은 돈으로 주식을 사들이고 대출이자까지 회사 쪽에 대게 했다는 언론의 폭로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이번 사태를 ‘형제의 난’이라고 부르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가 “오너 일가가 경영을 독식하는 한국식 ‘패밀리 비즈니스’로는 한국 경제의 미래가 없다”고 일갈한 바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두산그룹은 형제와 조카들 수십명이 계열사 지분 7%대로 순환출자를 통해 국내 재계 10위의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인 ‘패밀리 비즈니스’ 재벌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은 채 “오너 일가가 경영을 독식하면 한국 경제의 미래가 없다”고 쓴소리를 하는 그의 진정성을 잊지 않는다면 그가 지금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한국식 패밀리 비즈니스를 깨뜨리려고 하고 있다는 걸 눈맑은 사람은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든 가족을 다그쳐 두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지 않을까.
진정한 미스터 쓴소리를 기대함
물론 쉽게 상상해서는 안 되지만, 그가 이를 위해 다양한 직·간접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누가 알겠는가. 지금 검찰이 서슬 퍼렇게 수사 의지를 벼리는 것도 박 회장의 계산 속에 다 들어있었을지. 그는 적어도 자신의 쓴 입으로 세상을 향해 쓴소리를 날릴 수 있는 전례가 없는 기업인이자 경제인인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돌아올 부메랑의 궤적까지도 치밀하게 그려놓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궤적 안에는 물론 당당하게 형사처벌을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돼 있을 터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혹여 그의 쓴소리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멸사봉공의 희생정신에 바탕하고 있다는 전제를 의심한다면 그를 처음부터 ‘미스터 쓴소리’로 부르지도 말았어야 할 일이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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