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우 전 총리
남덕우 전 총리 별세
박정희에 발탁 ‘서강학파 대부’
수출 중심의 압축성장 이끌어
2007년 박근혜 경제좌장 역할
박정희에 발탁 ‘서강학파 대부’
수출 중심의 압축성장 이끌어
2007년 박근혜 경제좌장 역할
1970년대 정부 주도의 개발경제 정책을 이끈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18일 밤 숙환으로 별세했다. 89살을 일기로 세상을 뜬 남 전 총리는 서강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재무장관에 발탁돼 압축 성장을 이끈 핵심 인물이다. 당시 최장수 재무장관(4년11개월)과 최장수 부총리(4년3개월)를 역임하며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화학공업 육성 등 정부 주도 수출 중심의 경제성장을 주도했다.
그는 2009년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성공한 정책가도 아니고 성공한 경제학자도 아니었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정책 의지를 시장경제 이론의 틀 안에서 소화하려고 안간힘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남 전 총리는 성장 중심 경제정책의 밑돌을 놓은 1세대 서강학파의 명실상부한 ‘대부’로 평가된다. 그는 최근까지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원로자문단 좌장, 국민원로회의 위원 등을 맡아 목소리를 내왔다.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는 당시 한나라당 유력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자문단 좌장직을 맡아 이른바 ‘근혜노믹스’ 입안에도 영향을 끼쳤다.
서강학파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때도 중용돼, 이승윤(부총리), 김종인(경제수석), 사공일(재무부 장관)씨 등이 그의 뒤를 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잠시 주춤했으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 등이 ‘3세대’에 속한다. 전경련은 논평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신 영원한 현역이자 우리나라 경제 현대화의 산증인”이라고 고인을 기렸다.
그러나 남 전 총리는 우리 경제의 성장정책을 입안·집행했다는 평가만큼이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은 불균형 압축성장에 기반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양극화를 뿌리내리는 씨앗이 됐다는 게 비판의 초점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남 전 총리는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경제 여건이 주어진 행복한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지만, 전태일과 피복노조로 상징되는 산업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며 “정부 주도 경제가 한계에 이르렀기에 이제 다른 ‘남덕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장례는 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으로 진행된다. 22일 영결식이 거행된 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192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유족으로 부인 최혜숙씨와 아들 남기선 뮤직소프트 사장, 남기명 동양증권 상무 등을 뒀다.
홍대선 이정훈 기자 hongd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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