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까지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등의 대형도매상들이 전국의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진은 1963년 12월 서울 중구 신당동 중앙시장 도로 준공기념 행사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60년대 대형도매점 갑의 시대에
제조업체 대리점 구축 시장 장악나서
'새로운 갑' 할인점 등 유통업체 가세
대리점 거래처 '골목상권' 파고들어
대리점, 갑들의 대결속에 영업악화
제조업체 단일 제품 취급 한계
여러 업체 다루는 '벤더' 전환 통해
골목상권과 긴밀한 네트워크 갖춰야
제조업체 대리점 구축 시장 장악나서
'새로운 갑' 할인점 등 유통업체 가세
대리점 거래처 '골목상권' 파고들어
대리점, 갑들의 대결속에 영업악화
제조업체 단일 제품 취급 한계
여러 업체 다루는 '벤더' 전환 통해
골목상권과 긴밀한 네트워크 갖춰야
남양유업 대리점주의 녹음파일에 이어 배상면주가 대리점주의 유서가 식음료 기업의 밀어내기 관행을 고발했다. ‘갑의 횡포’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고, 두 업체는 머리숙여 사과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불공정 거래 근절을 강조했고, 모든 업계가 갑을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그럼 이제 대리점주들은 웃으며 장사할 수 있을까?
제조업체가 제품 생산 뿐 아니라 유통망까지 직접 구축하고 있는 한국의 독특한 대리점 구조, 빠른 속도로 진행중인 유통업계의 질서재편 과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병행되지 않는 한 ‘을의 눈물’은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대리점의 기원 1960년대 한국 유통시장은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방산시장, 청량리시장, 영등포시장 등에 자리잡은 대형도매점이 장악하고 있었다. 주로 `○○상회'라는 이름을 단 이들이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의 중도매상, 소도매상, 소매상 네트워크를 거쳐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전달했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간 식품 제조업체들도 초기에는 이들에 의존했다. 하지만 여러 제조업체와 동시에 거래하는 이들 대형도매점을 통해서는 대량생산에 걸맞은 판매를 기대할 수 없었다. 대형도매상들은 상품의 회전율보다는 마진율을 중시했다.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마진율이 높은 덤핑 상품이 상점에 진열되고, 품질이 우수하지만 제조원가가 높아 마진이 떨어지는 상품은 외면당했다. 이들을 통해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 등을 파악하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제조업체들간 경쟁을 이용해 무리한 리베이트를 요구하거나 대금을 제때 지불하지 않고 외상대출을 요구하는 등 ‘갑의 횡포’를 일삼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제조업체들은 직접 시장공략에 나섰다. 기존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지역을 분할해 판매차량으로 전국을 돌며 직접 거래선을 방문하는 ‘루트세일(route sale)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1969년 미풍판매㈜라는 판매 전문회사를 설립한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은 판매사원 160명을 채용했고, 이들이 차량에 조미료·설탕·밀가루 제품을 싣고 전국의 소매점을 누볐다. 롯데제과도 1972년 120명의 영업사원을 모집해 루트세일에 나섰다.
이어서 제조업체들은 지금과 같은 형태의 대리점 또는 특약점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보통 유제품과 음료 등 유통기한이 짧고 냉장보관이 필요한 제품을 취급하는 곳을 대리점이라 부르고, 라면이나 과자 등 상온보관 제품을 취급하는 곳을 특약점이라고 부르게 됐다. 모두 한 개 업체의 제품만 취급하기로 계약을 맺은 자영업자다. 미원(현 대상)이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특약점 판매망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경쟁사인 제일제당도 1972년부터 종합대리점 체제로 유통망을 개편했다. 해태제과가 1972년 전속대리점인 ‘해태센터’를 설립하기 시작해 3년만에 전국 150개점을 구축했고, 롯데제과도 1974년 40곳을 시작으로 직매소를 구축해나갔다.
이런 현상이 9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제조업체가 대형도매점을 제치고 유통에서 ‘갑’의 지위를 차지했다. 한국식품공업협회에 따르면 1994년 식품 제조업체의 도매상 의존도는 10% 미만으로 떨어졌고, 대부분의 제품이 대리점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전달됐다. 통계청의 도소매업조사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전국의 가공식품·비알콜음료 도매업체 수는 1만9021개다. 이가운데 대리점·특약점 형태의 도매업체에 대한 통계는 작성되지 않지만, 제조업체마다 200~300곳의 대리점이나 특약점을 두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도매업체의 다수가 제조업체의 대리점이나 특약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손일선 도쿄대 특별연구원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제조업체의 대량생산과 더불어 도매단계의 조직화 내지 계열화에 의해 유통지배력은 도매상에서 제조업체로 바뀌었다”며 “서울의 인구 집중,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광고선전, 고속도로 개설에 따른 전국시장 형성 등 외부환경 요인도 제조업체의 유통조직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 새로운 힘의 이동 1993년 11월 서울 도봉구에 국내 최초 할인점인 이마트 창동점이 문을 연 것은 한국 유통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후 1996년 유통시장 전면개방으로 월마트 등 외국계 할인점까지 들어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할인점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 2003년 백화점 매출규모를 추월, 국내 최대 소매업태의 지위를 차지했다. 2012년 말 현재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빅3 업체’가 전국 381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할인점이 유통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하자 대리점을 통해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제조업체들과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소비자 판매가격을 둘러싼 대결이 대표적이다. 이마트는 2010년 3월 라면시장 판매 1위 제품인 농심 신라면의 가격을 박스당 1050원 내려 판매했다. 그러자 농심은 이마트에 신라면 공급을 중단했다. 할인행사로 이마트의 신라면 판매가 7배 이상 늘어 그만큼 농심의 수익이 늘어났는데도 공급을 중단한 것은 농심이 자신의 특약점을 지키기 위한 조처였다. 농심로부터 직접 제품을 들여와 곧바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이마트의 가격인하는 최소 2~3단계를 거쳐 소비자를 만나는 농심 특약점에게 치명적이다. 대리점과 특약점이 무너져 자체 유통망을 잃으면 농심 등 제조업체는 할인점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이미 1999년 9월 유통업자가 상품판매가격을 자율적으로 정하는 ‘오픈프라이스 제도’가 시행됐다. 제조업체가 최종 판매가격에 간섭하지 않도록 그동안 제조업체의 권한이었던 권장소비자가격 기재를 폐지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농심과 이마트의 사례에서 보듯 제조업체들은 할인점의 가격인하에 저항하고 있다. 한 할인점 상품구매팀장은 “아직까지 제조업체의 동의 없이 할인점이 마음대로 판매가격을 메길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특히 각 분야 1등 상품들은 여전히 제조업체가 가격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전했다.
할인점들은 대기업들의 독과점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 두부시장은 풀무원, 씨제이, 대상 등 3개 대기업이 전체 시장의 82%를 점유하고 있다. 전국적 대리점망을 갖춘 이들 대기업의 틈바구니에서 한때 도산위기로까지 몰렸던 소형 두부 제조업체 자연촌은 2006년부터 이마트와 거래를 하면서 자체 유통망 없이 6년 동안 4억원에서 100억원으로 매출이 늘었다. 2010년 롯데마트가 출시한 롯데라면을 비롯해 여러 할인점들이 출시한 자체브랜드 상품(PB상품)도 할인점이 중소기업과 손잡고 기존 대기업의 독과점에 도전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힘겨루기는 할인점 쪽으로 승부가 기울고 있다. 식품 제조업체 매출 1위인 CJ제일제당의 2012년 사업보고서를 보면, 할인점과 편의점을 통한 판매가 39.4%로 대리점(31.2%)을 크게 앞질렀다. 매출 2위인 농심은 할인점과 편의점 등으로 직접 판매하는 비율이 62.6%로, 특약점 판매 비율(37.4%)의 2배에 근접했다. 한 대형마트의 임원은 “제조업체는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며 “한국처럼 제조업체가 유통까지 맡는 것은 비정상적”이라고 말했다.
■ ‘총알받이’ 을의 운명 대형 할인점에 이어 첨단 물류 시스템으로 무장한 기업형 슈퍼마켓(SSM)과 편의점(CVS)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드러그스토어도 뒤를 잇고 있다. 모두 제조업체로부터 직접 제품을 공급받는 곳들이다. 이에 따라 대리점의 거래처인 동네슈퍼 등 이른바 ‘골목상권’이 타격을 받고 있다. 대리점의 영업환경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남양유업과 배상면주가의 경우처럼 제조업체들도 대리점을 무리하게 압박하기 십상이다. 최근 큰 주목을 받은 밀어내기 영업은 사실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거 제조업체간 시장점유율 경쟁이 치열할 때마다 밀어내기가 일어났다. 1970년대 미원과 제일제당이 ‘조미료 전쟁’을 벌일 때에도, 2007년 진로(현 하이트진로)와 두산주류(현 롯데주류)가 ‘소주 전쟁’을 벌일 때에도 밀어내기가 문제가 됐다. 다른 제조업체 뿐만 아니라 유통업체와도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조업체는 밀어내기 유혹에 더욱 쉽게 빠진다. 한 식품업체 관계자는 “제조업체가 할인점에 대항하려면 대리점에 대한 밀어내기 영업으로 할인점 외 판매비율을 최대한 높이는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옛 갑’인 제조업체와 ‘새로운 갑’인 할인점 등 유통업체의 대결 속에서 대리점들이 피해를 입고 있지만, 단일 제조업체의 제품만 취급하는 대리점이 본사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대리점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면 다양한 업체의 제품을 취급하는 ‘벤더(vendor)’ 형태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승룡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대리점은 제조업체의 ‘최일선 총알받이’다. 제조업체에서 유통업체로 ‘힘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와중에 대리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 대리점이 골목상권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갖춘 ‘벤더(vender)’ 형태로 전환해야 제조업체와 할인점에 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리점의 벤더화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는 증언도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유제품 업체 관계자는 “3~4년 전부터 여러 업체의 상품을 취급하는 변종 대리점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계약위반이지만 대리점들의 상황이 워낙 안좋은 상황이라 본사 영업사원들도 모른 척 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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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대량생산에 들어간 식품 제조업체들은 기존 대형도매상을 통한 제품 유통에 어려움을 겪자 직접 전국적인 대리점망 구축에 나섰다. 사진은 1970년대 해태제과(현 크라운해태제과)의 대리점인 ‘해태의 집’ 모습.
2010년 3월 신라면 가격인하를 둘러싼 농심과 이마트의 갈등은 ‘유통권력’이 제조업체에서 할인점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밀어내기' 등 배상면주가 본사의 횡포를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천의 대리점주 이아무개씨 유족이 16일 오전 경기 부천시 복사골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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