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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잠시만요~ ‘우유값의 정치학’
따져보고 가실게요

등록 2013-10-01 20:13수정 2013-10-02 11:31

‘우유값 인상’ 진통 언제까지…
낙농가들이 우유 제조업체로부터 받는 원유값이 106원 오른 게 지난 8월1일이었다. 이에 맞춰 서울우유가 우유 소비자가격을 1ℓ당 250원 올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와 소비자단체가 인상폭 축소를 요구하고 나섰고, 대형마트와 우유 제조업체가 지리한 가격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지난 8월30일 서울우유가 1ℓ당 220원 인상하는 데 합의했고, 뒤이어 다른 제조업체들도 10월부터 200원 안팎 올리는 것으로 우유값 논란이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우유값 200원 올리는 데 두달이나 진통을 겪었다. 내년에도 똑같은 진통을 겪어야만 하는 걸까.

■ ‘보이지 않는 손’은 젖을 못 짠다 수요·공급의 법칙에 맡기면 자연스럽게 우유값이 정해질텐데 웬 난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유를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면 큰 혼란이 벌어진다. 우유는 수요의 변화에 따라 공급을 순발력있게 조절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젖소에서 젖을 짜려면 최소 28개월을 키워야 한다. 일단 젖을 짜기 시작하면 하루 두번씩 매일 젖을 짜야 한다. 젖을 짜지 않으면 젖소는 병에 걸린다. 게다가 가장 영양이 풍부한 식품으로 꼽히는 우유는 미생물이 번식하기에도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저장해뒀다가 팔 수도 없다. 젖소를 키우는 농가의 가격 협상력이 절대적으로 약해 수요의 작은 변화에도 쉽게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미국·유럽·뉴질랜드 등 대부분의 낙농 강국에서는 농가들이 협동조합으로 똘똘 뭉쳐 가격을 통제한다.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는 정부가 농가 경영과 우유 수급 안정을 위해 가격 결정에 개입한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부터 정부가 고시가격을 통해 원유값을 통제했고, 1999년부터 낙농진흥회에서 농가와 우유 제조업체가 생산비용과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해 협상을 통해 원유값을 결정했다.

그래도 가격 협상은 쉽지 않았다. 농가들은 서울로 젖소를 끌고 올라와 항의시위를 벌이곤 했다. 2011년 협상 때에는 농가들이 원유 납품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여의도에서 원유를 쏟아버렸다. 이런 극단적인 갈등을 반복하지 말자는 취지로 당시 합의된 게 ‘원유가격 연동제’다. 통계청의 원유 생산비용 조사를 토대로 미리 정해둔 공식에 따라 해마다 원유가격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원유가격 연동제가 올해 처음 적용돼 8월1일부로 원유값이 1ℓ당 106원 올랐다.

공급조절 어렵고 보관 어려워
농가의 가격 협상력 ‘취약’

원유가격원동제 도입됐지만
‘MB 물가지수’로 냉가슴 앓던
제조업체들 가격인상 적극 나서
우유 유통의 20% 맡고 있는
대형마트가 이를 억누르는 양상

업계선 우유값 인상억제 배후로
물가관리 시늉하려는 정부 지목
250원 인상 가구당 연 3만원 부담
“수천만원씩 오르는 전셋값 놔두고
만만한 우유업체 팔만 비틀어”

인위적 통제보다 근본적 처방 필요
“값비싼 수입사료 의존 줄이고
소모적 마케팅 경쟁 자제해야”

■ 우유값 협상, 전선이 이동했다 과거에는 우유 제조업체가 농가의 원유가격 인상을 누르는 형국이었는데, 올해에는 대형마트가 제조업체의 인상 요구를 누르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완제품 우유에서 원유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79.1%에 달하는데, 원유가격 연동제로 정해진 가격을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 제조업체는 사실상 가격 결정권을 잃었다. 게다가 2011년 우유값 인상 당시 이명박 정부는 ‘엠비(MB) 물가지수’ 품목에 포함된 우유 가격 억제를 위해 원유가격 인상분 외의 가격인상을 틀어막았다. 2008년 우유값 인상 이후 인건비를 포함한 비용 상승분을 반영하지 못한 제조업체는 적극적으로 가격 인상에 나설 수 밖에 없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제조에서 유통으로 시장 권력이 옮겨가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 우유 제조업체들은 가정 배달과 동네 슈퍼를 통해 사업을 키워왔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배달판매 비중이 급격히 줄어 지금은 6~7% 수준까지 떨어졌고, 대형마트 의존도는 20% 수준까지 높아졌다. 이제 대형마트 없이 우유를 판매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게 됐다.

유일한 예외가 있는데, 발효유 시장점유율 1위인 한국야쿠르트다. 이 회사는 대형마트에 제품을 거의 납품하지 않는다. 1만3000여명에 이르는 ‘야쿠르트 아줌마’를 통한 판매가 97%에 이른다. 대형마트 직원들도 사무실에서 ‘윌’, ‘쿠퍼스’ 등을 야쿠르트 아줌마에게 배달받아 마신다. 한국야쿠르트는 1일 대형마트와의 협상 없이 우유값을 200원 올렸다. 독보적인 브랜드 파워 덕분에 가능한 일이라는 게 업계의 평가다.

최근 우유값 인상분 220원(서울우유 기준)에서 원유값 인상분 106원을 뺀 나머지 인상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유가공협회에 따르면, 5년 동안 비용인상을 제품가격에 반영 못한 제조업체 몫이 39.2원, 나머지 74.8원이 유통비용이다. 유통비용이라고 하면 대형마트가 다 가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중 대형마트 몫은 22원이다. 나머지 52.8원은 대리점 몫이다. 철저한 냉장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유는 식품 가운데 유통비용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품목이다. 유통비용을 더 줄이라는 요구는 지난 봄 ‘을의 상징’으로 떠오른 대리점주들의 밥그릇을 줄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

■ 가구당 연간 3만원짜리 물가관리? 우유값 인상을 억제하려는 배후에는 정부가 있다는 게 유업계와 유통업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7월 대형마트 담당자들을 불러모아 사실상 우유값 인상 자제를 요청했다. 농협 하나로마트가 나서서 제조업체들과 가격협상을 벌인 것도 정부의 입김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우유가 기초 생필품인 만큼 물가관리를 위해 정부가 가격을 억제하는 게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우유값이 물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과도하다는 게 우유업계의 생각이다. 통계청의 2012년 소비자물가지수 가중치 품목을 보면, 우유는 상수도요금과 함께 5.8로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37위에 머물렀다. 1위는 전세(61.3), 2위는 월세(30.5), 3위가 휘발유(28.7), 4위가 이동전화 요금(26.7)이었다.

익명을 요청한 우유 제조업체 관계자는 “낙농진흥회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흰우유 소비량이 약 33ℓ다. 서울우유의 애초 요구대로 250원을 인상해도 1인당 연간 8250원, 4인가구 기준 3만3000원이다. 수천만원씩 오르는 전세값은 잡지도 못하면서 만만한 우유업체만 팔을 비틀고 있다. 정부가 실제로 물가를 잡으려는 의지가 있는 게 아니라 시늉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소비량 정체에 빠진 우유업계 우유업계가 어려움에 처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 우유 소비량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정체돼있기 때문이다. 1인당 우유소비량은 1981년 9.62ℓ에서 1991년 31.18ℓ로 10년 만에 3배나 뛰었다. 하지만 1997년 37.05ℓ를 기록한 뒤 계속 떨어져 최근에는 33ℓ 수준에 머물고 있다.

우유산업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가격통제보다는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값이 싼 사료를 확보하는 일이다. 원유 생산비용에서 사료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60~70%에 이르는데, 낙농가들은 값비싼 수입사료에 의존하고 있다. 박종수 충남대 교수(낙농학)는 “겨울에 농사를 짓지 않는 논을 활용하면 목초사료를 싼 값에 확보할 수 있다. 정부가 농협 등을 통해 대규모 평야지대에서 목초사료를 수확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지원해주면 원유 생산비를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유 제조업체들이 많은 비용을 들여 마케팅 경쟁을 벌이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박 교수는 “흰우유는 업체마다 품질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저마다 자기 우유가 낫다고 광고를 하고 있다. 소모적인 마케팅 경쟁보다는 정체된 우유 소비를 확대하기 위한 공동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국 시장 개척이 우유 업계의 활로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은 ‘멜라민 우유’ 파동 등으로 인해 소비자들의 자국 우유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 수입한 멸균우유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일반 우유는 냉장 상태에서 유통기한이 11~12일이지만, 멸균우유는 8~10주까지 상온에서 보관이 가능하다. 대신 맛은 일반 우유만 못하다. 한 우유업체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중국까지 배로 약 8시간이면 우유를 보낼 수 있다. 신선한 일반 우유를 충분히 유통시킬 수 있다. 중국 수출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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