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경제 경제일반

인스턴트 커피 시장, 식은 게 아니었어?

등록 2013-12-24 19:48수정 2013-12-24 21:30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경제 쏙] 뜨거운 ‘인스턴트 커피’ 쟁탈전
커피 전문점이 늘어날수록 ‘인스턴트 커피’ 소비는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었을까? 인스턴트커피 시장의 덩치는 계속 커지고 있다. 남양유업이 최근 새로 공장을 지으며 이 시장에 뛰어든 건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예다. 국내 커피 시장의 독특한 역사와 인스턴트커피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본다.

유럽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수입·판매해온 남양유업이 지난달 전남 나주에 2000억원을 들여 지은 인스턴트 커피믹스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공장 가동과 함께 신제품 ‘프렌치카페 카페믹스 누보’를 출시하면서 ‘인산염을 뺀 커피’라는 점을 내세워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남양유업은 2010년 처음 인스턴트 커피 시장에 진출할 때에도 ‘카제인나트륨’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인산염이나 카제인나트륨 모두 안전성이 검증된 물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식약청(현 식약처)도 남양유업의 카제인나트륨 광고가 ‘식약청의 허가를 받은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해 다른 제품을 오해하게 하는 것은 비방광고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남양유업은 “조금이라도 더 자연에 가까운 식품을 만들고자 했다”고 하지만, 식품업계에서는 커피시장 후발주자인 남양유업의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평가가 많다.

후발주자가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노이즈 마케팅을 불사하는 건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골목마다 커피 전문점이 들어서고 해마다 원두커피 소비가 급증하는 시대에 연매출 1조3650억원(2012년) 규모인 회사가 2000억원이나 투자해 새 공장을 짓고 뛰어든다는 것은 새삼스러워 보인다. 인스턴트 커피 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든 게 아니었던가?

■ 미군과 함께 상륙한 인스턴트 커피 구한 말 서양의 선교사·상인들을 통해 커피가 처음 한반도에 들어왔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때 커피에 빠져들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1900년대 초반 조선에 들어와 ‘부래상’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쓰며 땔감사업을 한 프랑스 상인이 나무꾼들에게 공짜 커피를 제공하며 땔감을 납품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 나무꾼들은 부래상이 주는 커피를 ‘양탕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한반도에서 커피를 접한 이들은 극소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과 함께 인스턴트 커피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상륙했다. 미군이 들고온 게 인스턴트 커피였던 건 당연한 일이다. 인스턴트 커피는 20세기 초에 개발됐지만,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생사의 문턱을 넘나드는 전장에서 군인들은 별다른 도구 없이 즐길 수 있는 인스턴트 커피로 극도의 긴장과 피로를 달랬다. 인스턴트 커피는 군인들의 필수 보급품으로 자리잡았다.

인스턴트 커피는 전후 한국인들의 입맛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커피와 다방의 사회사>(강준만, 오두진 공저)라는 제목의 책에 따르면, 당시 커피는 대부분 다방에서 소비됐는데, 한국전쟁 직전 서울에 100여곳에 불과했던 다방은 1959년 800여곳, 1969년 5000여곳으로 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와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수치다. 2013년 현재 전국의 커피전문점 수는 7000여개로 추정된다.

1970년 미국 제너럴푸드(현 크래프트)와 기술제휴한 동서식품이 처음으로 국내에서 생산한 커피 ‘맥스웰하우스’를 내놨다. 이후 세계적으로 커피 시장 1위 기업인 네슬레도 1990년대 초반 ‘테이스터스 초이스’를 내놓으며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동서식품과 네슬레의 치열한 경쟁이 계속됐다. 업계에서는 이 시기를 ‘솔루블(soluble) 커피 시대’라고 부른다. 솔루블 커피란 물에 녹는 커피라는 뜻인데, 유리병으로 포장된 순수한 인스턴트 커피 제품을 커피·크리머·설탕을 섞은 커피믹스 형태의 제품과 구별짓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다. 남양유업 관계자는 “처음부터 인스턴트 커피에 길들여진 입맛이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올 한국 커피소비 242억잔 중
커피믹스 151억잔 등 포함
인스턴트커피가 소비량의 77%

동서식품이 그 시장의 81% 독식
후발 남양유업 새 공장 짓고 추격

커피점 중심 원두커피 소비 급증
고급 커피 맛 내는 제품 출시 경쟁

IMF 거치며 사무실 인기식품 등극
인스턴트커피 미래는 쓸까 달까

■ IMF 구제금융이 연 커피믹스 시대 1990년대까지 웬만한 회사에는 부서마다 경리 업무와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하는 여직원이 있었다. 흔히 ‘미스김’ 등의 호칭으로 불렸던 이들이 담당한 일 가운데 하나가 커피 심부름이었다. 하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사태가 터졌다. 회사마다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나섰다. 미스김들이 가장 먼저 회사를 떠났다.

살아남은 아저씨들은 당황스러웠다. 다방에서나 사무실에서나 남이 타주는 커피만 마셨을 뿐 직접 커피를 타본 적이 없었다. 그들을 구원한 게 커피와 크리머, 설탕을 ‘황금비율’로 섞은 커피믹스였다. 마침 뜨거운 물이 나오는 정수기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코웨이가 정수기 렌탈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1998년이었다. 정수기에서 받은 뜨거운 물에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회사원들은 잦은 야근과 부쩍 높아진 노동강도를 버텨냈다. ‘커피믹스 시대’의 시작이다.

1976년 처음 개발됐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커피믹스는 구제금융 사태를 기점으로 급속히 판매가 늘었다. 1997년 당시 커피믹스 소비량은 솔루블 커피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후 해마다 20~30%씩 늘어 2005년 솔루블 커피를 역전했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아이엠에프로 인한 구조조정이 커피믹스 시대를 연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꼭 아이엠에프가 아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 두드러지고 권위적인 직장문화가 점차 사라지면서 여직원이나 부하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됐다”고 말했다.

커피믹스 시대를 거치며 동서식품은 업계 1위의 자리를 확고히 다졌다. 주요 대형마트에서 동서식품의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 커피믹스는 수년째 단일 품목 매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 커피시장 1위 네슬레는 한국에서 후발주자인 남양유업에까지 밀리며 자존심을 구겼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우리는 미리 커피믹스 시대를 예상하고 기술개발과 설비투자에 힘쓴 데 비해 네슬레는 한국 시장의 특수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타이밍을 놓쳤다”고 말했다.

동서식품의 자사 매출과 에이시(AC)닐슨의 시장조사 자료, 관세청의 원두 수입량 자료를 종합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13년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242억잔의 커피가 소비됐다. 그 중 커피믹스가 151억잔으로 64%를 차지한다. 솔루블 커피까지 더하면 인스턴트 커피가 전체 커피 소비량의 77%를 차지한다. 그런 인스턴트 커피 시장의 81%를 동서식품이 차지하고 있다. 남양유업이 이 시장에 뛰어든 이유다.

■ 커피믹스의 미래 2013년 현재 커피전문점을 중심으로 한 원두커피 소비량은 전체 커피 소비량의 11%에 불과하지만, 이 시장은 해마다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23개에 달하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들이 계속해서 매장을 늘려가고 있다. 인스턴트 커피로 처음 커피를 접한 세대가 지금까지 커피믹스 수요를 떠받쳐왔는데, 어려서부터 원두커피를 접한 세대가 계속 늘어나면 커피믹스는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

이런 고민에 대한 답으로 동서식품이 내놓은 것이 2011년 출시된 ‘카누’다. 커피 전문점에서 마시는 카페 아메리카노 맛에 가까운 프리미엄 인스턴트 커피다. 남양유업이 내놓은 ‘루카’도 마찬가지 제품이다. 올해 카누 매출은 지난해 대비 90% 이상 늘었다. 스타벅스, 이디야커피 등 커피 전문점들도 매장에서 판매하는 커피의 맛을 재현한 커피믹스 제품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가장 저렴한 커피 전문점에서도 아메리카노 한 잔이 2500원이다. 하루에 한 두 잔을 마실 수는 있지만, 사무실에서 수시로 마시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일반 커피믹스는 1잔당 120~130원, 프리미엄 커피믹스는 220~310원 수준이다. 변화하는 입맛에 맞춘 저렴한 커피믹스가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뒤늦게 인스턴트 커피 사업에 뛰어든 남양유업은 수출 시장을 노리고 있다. 아직까지 원두커피에 입맛이 길들여지지 않은 소비자가 많은 나라가 타깃이다. 남양유업 쪽은 “우리나라와 접근성이 좋고 커피 시장이 급속히 커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인스턴트 커피 비중이 50%인 일본 등을 적극적으로 공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경제 많이 보는 기사

트럼프 가족모임에도 낀 ‘특급공신’ 머스크…‘IT 차르’ 등극하나 1.

트럼프 가족모임에도 낀 ‘특급공신’ 머스크…‘IT 차르’ 등극하나

‘트럼프 랠리’ 테슬라 또 9% 상승…5일 만에 44% 폭등 2.

‘트럼프 랠리’ 테슬라 또 9% 상승…5일 만에 44% 폭등

네이버 ‘지금배송’ 나선다…쿠팡 ‘로켓배송’에 도전장 3.

네이버 ‘지금배송’ 나선다…쿠팡 ‘로켓배송’에 도전장

‘시세 조종’ 의혹 조사 중인데…삼부토건 주가 또 급등 4.

‘시세 조종’ 의혹 조사 중인데…삼부토건 주가 또 급등

세종과학기술원(SAIST) 세미나 5.

세종과학기술원(SAIST) 세미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