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부터 역대정부서 추진해와
싱가포르 넘어선 저장시설 확충해
석유 트레이더·평가기관 유치 계획
규제완화·세제혜택에 금융지원도
“금융 인프라 없인 창고업 불과” 우려
싱가포르 넘어선 저장시설 확충해
석유 트레이더·평가기관 유치 계획
규제완화·세제혜택에 금융지원도
“금융 인프라 없인 창고업 불과” 우려
정부가 2020년까지 ‘동북아 오일허브’를 구축한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놨다. 이 사업은 ‘오일허브’를 공약한 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역대 정부도 단골로 핵심 국정과제에 올렸던 내용이다. 하지만 석유 거래를 주도할 전문 인력과 금융 인프라 등을 확보하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장밋빛 구상이 현실화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5차 무역투자진흥회의 및 지역발전위원회 연석회의에서 ‘동북아 오일허브 추진 대책’을 보고했다. 오일허브는 대규모 석유저장시설을 기반으로 국제적 석유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는 중심지를 뜻한다.
미국 걸프만 연안, 유럽 에이아르에이(ARA: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암스테르담) 지역, 싱가포르 등이 세계 3대 오일허브에 손꼽힌다. 미국의 경우 뉴욕상업거래소(NYMEX)를 통해 하루 평균 32억달러어치의 서부텍사스산 원유가 거래된다. 일반적으로 석유 거래는 정제업자가 산유국 석유회사로부터 직접 원유를 구매하는 ‘직접 거래’와 트레이더들이 유종 혹은 지역 간 석유 가격 차이를 활용해 거래 차익을 얻는 ‘중계 거래’, 미래에 공급될 석유를 특정 조건으로 사고팔 수 있는 ‘파생상품 거래’ 등으로 구분된다.
동북아 지역은 한국과 중국, 일본 등 3개 나라가 세계 석유 수요의 19%(2011년 기준)를 차지할 정도로 매력적인 시장이다. 이 지역에서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싱가포르 외에 제2의 오일허브가 마련될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정부는 항만 수심이 얕은 중국이나 잦은 자연재해에 시달리는 일본에 견주면 우리나라가 오일허브 입지로 훨씬 더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국내에서 이런 논의가 처음 시작된 건 1999년이다. 정유공장들이 앞다퉈 고도화 설비를 갖추고 수출 물량이 급증하면서 석유 물류 허브를 구축하자는 아이디어가 처음 나올 무렵이다. 이명박 정부도 2008년 동북아 오일허브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다만 당시에는 저장시설 구축에 무게가 좀더 실렸다. 그동안은 에너지 안보 목적에서 석유비축시설을 확보해왔기 때문에 상업용 거래를 위한 저장시설 확보가 필요했다. 지난해 준공된 전남 여수의 저장시설이 그 결실이다.
2020년까지 울산과 여수에 3660만배럴의 탱크터미널(저장시설)을 건설하고, 2000만배럴의 정부 비축시설을 민간에 대여하면, 싱가포르(5220만배럴)를 넘어서는 저장시설이 확보된다고 산업부는 밝혔다. 이와 함께 동북아 지역의 석유 가격 형성을 유도할 가격 평가기관(미국 플래츠, 영국 아거스 등)을 유치하고 파생상품 상장을 추진하는 등 금융 인프라를 확대할 계획이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분석에 따르면, 동북아 오일허브 구축으로 인한 단기적 경제효과는 3조6000억원, 장기적으로는 6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부 안팎에선 자칫 저장시설을 구축하는 데 그치는 ‘반쪽짜리’ 오일허브가 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김준동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은 “글로벌 석유 트레이더를 유치하기 위한 국제 경쟁에서 성과를 거둘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말부터 정부 주도로 주롱섬에 오일허브를 조성한 싱가포르 사례를 본떠, 규제를 풀고 인센티브를 부여해 주요 석유기업과 트레이더 등을 유치하겠다는 게 산업부의 구상이다. 이번 대책에 해외 석유 트레이더가 국내에 법인을 설립할 때 5년간 법인세를 면제하고, 이후 2년간은 50% 감면해주는 등의 세제 혜택이 담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또 복잡하고 까다로운 석유 거래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석유 트레이딩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금융지원 방안도 담았다. 예컨대 올해 말부터는 석유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런 대책에도 불구하고 기존 오일허브를 따라가는 수준으로 글로벌 트레이더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걸음마 수준의 금융 인프라가 걸림돌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석유 트레이딩 지원을 위한 금융 기능이 초보 수준이다. 트레이더를 유치하지 못하면 저장시설만 갖춘 일종의 ‘창고업’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오일허브를 구축하더라도 금융 서비스 기능은 홍콩과 상하이 등 역외 금융 중심지에 형성되는 최악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얘기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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