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30대 재벌 중 절반 이상이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제3자 배정을 통한 유상증자’ 규정에 특별 예외를 두는 쪽으로 정관 개정 작업을 벌이고 있다. 시민단체 쪽에서는 재벌 총수 일가의 경영권 편법 승계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란 주주가 아닌 제3자에게 유상증자 참여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신기술 도입과 재무구조 개선 등 회사의 경영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기존 주주에게도 제3자 배정을 통한 신주 인수를 허용하는 예외가 생겼다. 총수 일가의 2세와 3세들이 세율이 10~50%인 상속세와 증여세를 내지 않고도 제3자 배정 신주 인수 예외규정을 통해 지분을 확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20일 금융투자업계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국내 30대 재벌 상장 계열사 190개 중 35개(18.4%)가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예외규정을 정관에 만들었거나 반영할 계획이다. 그룹별로는 30대 그룹 중 53.3%인 16곳이 해당한다. 예를 들어 한화그룹 계열사인 한화케미칼은 21일 여는 주주총회에서 “발행주식 총수의 100분의 30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신기술 도입, 재무구조 개선 등 회사의 경영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회사의 주주를 포함한 특정한 자에게 신주를 배정하기 위하여 신주 인수의 청약을 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내용을 정관에 넣을 예정이다.
재벌 그룹들은 그동안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이나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승계용 종자기업을 키워왔다. 그러나 삼성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논란 이후 경제민주화 바람 등으로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화돼온데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일감 몰아주기 제한 등 관련 규제가 촘촘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주주에 대한 신주 배정 특례 마련은 경영권 승계를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될 수 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신기술 도입이나 재무구조 개선 필요성 등은 해당 기업 이사회 판단만으로는 검증이 어렵다. 실제로 정관 개정을 하는 회사들을 보면 오너(최대주주) 지분을 넘겨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한화 등 2·3세 승계가 예정된 기업들이 상당수”라고 지적했다. 예외규정에 사후 검증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실제 재무구조 개선 필요성에 따라 제3자 유상증자 특례 조항을 필요로 하는 기업도 있다. 이 때문에 제3자 배정 유상증자의 목적이 신기술 도입이나 재무구조 개선 때문인지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금융시장 일각에선 자금 문제 등으로 재벌들이 이 조항을 악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종우 아이엠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오용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로 기업이 승계 목적으로 제3자 유상증자 배정을 하려면 남의 눈에 너무 띈다는 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박영훈 엘아이지(LIG)투자증권 연구원은 “시가총액 2조원짜리 기업에 유상증자를 하려면 적어도 2000억원은 현금을 동원해야 지분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기업 쪽도 오용 가능성을 부인한다. 한 그룹 관계자는 “특별 예외규정 마련은 우리 의지가 아니라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상장사협의회가 상장사들에 가이드라인을 줬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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