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가는 규제완화] 실효성 없는 규제풀기 ‘전시행정’
안전성 인증된 대체수단 없는데
인증서 의무사용 규정 폐지키로
보안 자신없는 업체들 계속 사용
계좌이체때도 필요해 사실상 유지
전문가 “규제개혁 표피적으로 접근”
안전성 인증된 대체수단 없는데
인증서 의무사용 규정 폐지키로
보안 자신없는 업체들 계속 사용
계좌이체때도 필요해 사실상 유지
전문가 “규제개혁 표피적으로 접근”
공인인증서는 푸드트럭과 함께 박근혜 정부의 ‘규제완화 1순위’로 떠올랐지만 국민들이 그 ‘족쇄’에서 벗어나긴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형국이다.
발단은 ‘한류 열풍’에 빠진 외국인들이 일명 ‘천송이 코트’(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여주인공이 입고 나온 옷)를 살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서 출발했다. 한국의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려면 공인인증서가 있어야 하는데, 외국인에게는 인증서가 발급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민원이 제기된 것이다. 지난달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1차 규제개혁 장관회의 겸 민관합동 규제개혁 점검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이를 문제 삼자, 공인인증서는 순식간에 ‘규제 척결’ 대상으로 부상했다.
이런 논의는 오랫동안 누적된 공인인증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등에 업고 제도 개선 추진으로 급물살을 탔다. 공인인증서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낡은 규제’로 지목받아왔다. 국제적인 은행감독 기준을 정하는 바젤위원회(BCBS)는 금융회사의 인증기법은 각 은행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무엇보다 공인인증서는 저장매체가 제한돼 있지 않고 피시(PC)와 이동식저장장치(USB) 등 다양한 매체에 저장·복사할 수 있는데다, 인증서를 발급받기 위해 설치해야 하는 액티브엑스(Active X)가 악성코드 유포 경로로 활용되는 등 보안상 허점이 속속 드러나왔다. 지난해만 해도 해킹으로 공인인증서 수백건이 여러 차례 유출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애초 금융위원회는 30만원 이상 전자상거래 때 공인인증서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현행 전자금융감독규정을 손질해, 외국인에게만 의무 사용을 면제해줄 방침이었다. 하지만 ‘내국인은 왜 차별하느냐’는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내·외국인 모두에게 허용하는 것으로 제도 개선의 폭이 커졌다. 금융위는 5월 중으로 이런 작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하지만 공인인증서 의무화 규정을 완화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별로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사고가 발생해도 책임이 면제되는 공인인증서 대신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인증 기술을 도입할 사업자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금융위 관계자도 “보안 문제에 자신이 없는 업체들은 공인인증서를 계속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금융위는 전자상거래에서 30만원 이상 카드 결제 때는 공인인증서 의무 사용 규정을 없애기로 했지만 온라인 계좌이체(30만원 이상)를 할 때는 여전히 공인인증서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할 방침이다. 전자상거래 외에 일반 자금이체거래에도 마찬가지로 공인인증서가 필요하다. 한술 더 떠 미래창조과학부는 액티브엑스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공인인증서를 쓸 수 있도록 개발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공인인증서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분위기가 남아 있는 셈이다.
이미 금융위는 2010년에도 공인인증서 의무화 규정을 사실상 없앤 바 있지만 실효를 보진 못했다. 당시 공인인증서와 동등한 수준의 안전성이 인정된 인증수단을 사용할 경우에는 공인인증서를 쓰지 않아도 되도록 규정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이 운영하는 인증방법평가위원회는 그동안 30만원 이상 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인증수단을 단 한 건도 허가한 적이 없다. 까다로운 기술평가 기준을 넘어선 업체가 한 군데도 없었단 얘기다.
한국무역협회가 공인인증서가 필요 없는 별도의 해외 직판 쇼핑몰을 구축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공인인증서 의무 사용이 초래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보다는 당장 대통령이 거론한 외국인들의 쇼핑 편의만 봐주고 말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구시대적 ‘관치 보안’ 발상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보안기술이 나오기 어렵다. 금융회사가 자율적으로 보안기술을 선택하게 하는 대신 사고에 대해서도 충분히 책임을 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규제 개혁을 표피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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