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현장에서
“주가를 올린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제프리)/ “왜?”(딸)
“그래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왜?”
“너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기 때문이지.”/ “왜?”
“너를 사랑하니까.”/ “왜?”
‘불신시대’ 연작 두 번째 작품으로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중인 연극 <엔론>(이수인 연출)에서 엔론의 전 최고경영자(CEO) 제프리 스킬링(김영필 분)의 어린 딸은 아빠에게 끝없이 “왜?”냐고 묻는다. ‘네가 아직 어려서’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면, 당신은 아마도 스킬링과 같은 병에 걸려 있는 것일 게다.
연극은 2011년 12월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한 미국 최대의 에너지 중개업체 엔론에서 벌어진 일을 극화한 것이다. 한때 시가총액이 770억 달러에 이르던 엔론의 주식은 파산과 함께 휴지조각이 됐고, 파산으로 퇴직금을 날린 직원은 5000명이 넘었다. 17년 역사를 가진 이 회사의 파산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기업파산이었다.
희곡 원작을 쓴 영국의 루시 프레블은 스킬링이 엔론에 도입한 ‘시가 회계’로부터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일년에 하나씩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고, 황금알의 값이 1억원이라고 하자. 이 거위가 내년에 낳을 황금알의 현재 가치는 1억원에서 1년치 이자를 제한 것이다. 시가회계란 이런 식으로 이 거위가 앞으로 낳을 모든 황금알의 값을 현재가치로 환산해 더해 자산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이다. 거위가 알을 1년에 두 개씩 낳게 하거나, 복제 거위 생산 기술이 개발되기라도 한다면, 거위를 가진 기업의 가치는 더 크게 오를 것이다.
시가 회계는 1990년대 월가 금융회사들에서 보편화하기 시작했지만, 비금융기업으로 이를 처음 도입한 곳이 바로 엔론이다. 엔론은 계약이 성사될 때마다 그 거래를 통해 앞으로 엔론이 창출하게 될 가치를 당장의 매출과 수익으로 당겨 잡았다. 그 결과 회계상 매출은 급증했고, 이는 엄청난 주가상승으로 이어졌다. 쉼 없는 주가 상승에 주주들은 환호했고, 스킬링은 영웅이 됐다.
그러나 실제 엔론으로 들어오는 현금 수익은 매우 적었다. 그것은 이 거품 게임을 위협했다. 스킬링에 의해 발탁된 최고재무관리자(CFO) 앤디 패스토우(양종욱 분)는 특수목적회사를 만들어 악성부채를 감추고, 엔론 본사의 장부를 화려하게 분칠한다. 회계감사를 맡은 아더 앤더슨도 이를 눈감는다. 엔론의 경영진은 수익창출을 위해 자체 혁신보다는 손 쉬운 정부의 ‘전력산업 규제완화’를 입에 달고, 이를 실현해줄 인물이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는데 목을 맨다. 하지만 급등한 주가를 정당화할 만큼의 수익은 끝내 따라주지 못한다.
속임수가 오래 성공하면, 진실을 말하던 사람들은 세상에서 ‘바보’ 취급을 당한다. 사장 자리를 두고 제프리와 경쟁하다 밀려나게 된 클로디아(박윤정 분)조차 결국은 제프리에게 ‘당신이 최고’라고 말한다. 그런데, 모래성이 어디 영원하던가?
배금주의는 돈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함께 태어났다. 자본주의는 이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고, 오늘날의 주주자본주의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돈은, 기업은 과연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엔론 사태와 닮은 구석이 많은 ‘세월호 참사’ 앞에 온 국민이 슬퍼하는 지금, 기업 경영자들에게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은 연극이다. 31일까지 공연한다. 일반 30000원.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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