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오른쪽)와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교수가 20일 오전 서울 소공동 플라자호텔에서 만나 대담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피케티-이강국 교수 대담
<21세기 자본>으로 세계적 스타 경제학자로 떠오른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18~21일 나흘 동안 한국을 방문하고 떠났다. 그는 과세 자료와 국민계정체계(SNA)를 이용해 소득과 부의 불평등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 20여개 나라의 불평등이 길게는 300년 넘게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줬다. 그가 책에서 말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시장에 내맡기면 경제적 불평등은 계속 커질 수 있는 만큼 부자의 재산과 소득에 세금을 더 매겨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월 국내 언론으론 처음으로 피케티를 인터뷰한 <한겨레>가 책의 한글 번역본 출간에 맞춰 방한한 그를 20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다시 만났다. 피케티는 이강국 리쓰메이칸대 교수(경제학)와 한 이번 대담에서 시장의 힘과 사유재산이라는 것도 민주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케티를 대담한 이 교수는 <21세기 자본>의 한글본을 감수했다. 그는 <가난에 빠진 세계> 등 불평등과 세계화를 다룬 책을 내고 관련 연구를 해왔다.
토마 피케티 “한국 불평등 해소하려면 교육 기회 자체가 평등해야” [한겨레담 특집]
높은 생산성 자랑하는 나라들
한국보다 조세부담률 높아
누진세제, 가장 시장친화적으로
부와 권력 집중 막을수 있는 방법 한국 소득불평등 우려할 수준
소득 최상위 기준으로 볼때
미국에 견줘 다소 낮지만
일본·유럽보다 훨씬 높아 이강국 당신 책이 왜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는가? 피케티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도 불평등에 대한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본다. 책을 쓰면서 돈(자본주의)의 역사는 경제적이면서도 정치적, 사회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강국 당신은 불평등을 자본주의의 법칙들과 관련된 동학으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피케티 맞다. 순전한 경제 성장으로만 불평등의 동학을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치 않는다. 경제적 힘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확대 또는 감소시킬 수 있는 다른 힘들이 있다고 본다. 불평등의 역사를 본다면 실제 불평등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정책과 제도라고 본다. 책의 중요한 발견 가운데 하나는 20세기 불평등의 역사는 정치와 1·2차 세계 대전, 대공황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또 20세기에 채택된 누진과세 체제와 교육제도, 새로운 복지 자본주의 등을 통해 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후 레이거노믹스 등은 불평등의 동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금융 규제완화는 (불평등 확대에) 강력한 영향을 줬다. 미래는 우리가 선택하는 정책과 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선 역사를 살펴보는 게 매우 유용하다. 이강국 불평등 동학은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말인가? 피케티 경제 동학에서 불가피한 것은 없다. 경제 역사는 우리가 선택하는 제도와 정책의 역사다. 이강국 경제학자로서 당신의 방법론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다만 당신은 주류 학자들을 비판하며 정치경제학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자본과 노동의 대체탄력성 등 주류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어 약간 혼란스럽다. 피케티 선택의 문제에 불과하다. 경제적 모델과 이론은 우리가 신중하게 사용한다면 아주 유용하다. 문제는 때론 경제학자들이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이 거의 없는데 이론은 복잡한 것을 사용하는 경우다. 단순한 수학적 모델이 결코 세상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서 쓴다면, 약간의 이론적 모델은 도움이 된다고 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면 다층적, 사회적, 정치적 관점을 갖는 게 중요하다. 이강국 나도 경제학이 더 역사적으로 가는 방향을 선호한다. 경제학은 지금부터 바뀌어야 한다. 당신은 책에서 정치가 중요하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다시 통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한국이나 미국을 보면 정치 시스템에서 시민들의 요구가 대표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피케티 불평등의 역사나 민주주의나 과세 문제가 항상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한다. 때론 올바른 정책 개혁을 얻기 위한 사고나 폭력적 충격이 수반되기도 한다. 지난 세기 역사를 보면 이전에 거부됐던 많은 개혁들이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채택됐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에선 1914년 여름에 1차 세계대전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의회에서 누진소득세제를 채택했다. 전시 충격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그전까지 지배층은 원치 않았다. 불평등이 매우 크면 정치에 대한 부유층의 영향력이 확대된다고 본다. 불평등이 매우 커진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정치 시스템이 상당 부분 지배층에 의해 포획됐을 가능성이 있다. 내 책 우려하는 보수주의자들
불평등 자체를 우려해야
소수 지배층의 국부 독점이
성장에 필수적이란 증거 없어 시장의 자기규제 능력에 대해
1990~2000년대에 지나친 믿음
자본주의를 공익 밑에 두려면
민주적 통제장치 재고해야 이강국 한국에서 많은 비평가들이 당신의 책을 읽지도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호들갑을 떨면서 비생산적으로 논쟁하고 있다. 피케티 유감이다. 상상이 가는 면이 있긴 하다. 보수주의자들은 내 책에 우려할 게 아니라, 불평등 자체를 우려해야 한다. 불평등을 확대시킨 건 내가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불평등한 현실을) 부인만 할 게 아니라, 눈을 뜨고 직시해야 한다. 불평등 문제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탈냉전 세대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냉전시대에 살고 있다. 아마 (북한과 냉전 중인) 한국에선 그럴 수도 있다. 그런 태도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사유재산과 시장의 힘을 믿지만, 그건 민주적인 제도의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 이강국 불평등을 줄이려 할 때 자본수익률(r)을 낮출 게 아니라, 성장률(g)를 끌어올리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냐는 주장도 있다. 피케티 한국에서 나를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다.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성장을 해야 한다는 데 찬성한다. 자본수익률과 관련해서도 수익률을 떨어뜨리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부에 대한 누진세를 부과하기 원한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이 부를 쌓고 부의 이동성이 더 커질 수 있다. 나는 단지 부의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서 매우 큰 부에 대해서만 수익률을 떨어뜨리기를 원한다. 이강국 경제가 훨씬 더 역동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피케티 맞다. 나는 총체적인 부의 축적이 줄어들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자본축적은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본과 건물, 설비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유용하다. 다만, 성장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국부의 더욱 더 큰 몫을 소수의 지배층이 갖어야 가능하다는 보수적 관점은 내가 제시한 경험적, 이론적 증거와 부합하지도 않는다. 이강국 1990년대 불평등이 심화된 이후, 많은 연구를 보면 심각한 불평등이 성장률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나온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선 높은 불평등과 낮은 성장률이 악순환을 빚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와 증세 등을 포함한 경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유다.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했던 한국 정부는 최근 서민증세 논란을 낳고 있다. 피케티 한국이 소득세(법인세와 소득세를 묶어 쓴 듯)의 누진성을 더 강화할 수 있다고 본다. 누진세제는 가장 시장 친화적인 해결책이고, 부와 권력의 집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증세로) 늘어난 재원을 교육과 사회복지에 더 투자한다면 생산성 향상과 성장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 단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최선의 방법은 한국이 세수를 늘려 교육 등에 투자하는 거라고 본다. 통상적으로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많은 나라들이 한국에 견줘 조세부담률이 더 크다. 이강국 당신이 제안한 글로벌 자본세의 경우 아직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최근 국제기구 등에서도 변화가 느껴진다. 세금과 관련해서 당신이 보기엔 어떤가? 피케티 부동산 자산세를 놓고 보면 한국과 중국, 일본, 프랑스 등 한 국가 차원에서 더욱 더 강화될 수 있다. 한국도 부채가 많은 자산가엔 가볍게, 그렇지 않은 고액 자산가에겐 더 많은 세금을 매길 수 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개혁이다. 사람들이 부동산을 갖고 다른 나라로 도망갈 순 없지 않냐. 그런데 만약 고액 금융자산에 과세하려면 국제간 협조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이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주요20개국(G20)의 아젠다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이드라인 등이 국제 협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중요한 건 협력에 동참하지 않는 나라나 조세회피지역에 대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세금 문제는 공손하게 요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때론 무역제재도 필요하다. 이강국 꼭 유토피아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건가. 피케티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이강국 불평등이 왜 문제인가? 피케티 나는 어느 지점부터 불평등이 나쁜지 수학적 공식을 갖고 있진 않다. 용인될 수 없는 불평등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적절한 민주적 토론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불평등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책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19세기나 1차 세계대전 전과 같은 극단적 부의 집중과 불평등한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성장과 혁신에 유용할 수 있다. 문제는 어느 수준을 넘어선 지나친 불평등이다. 이는 성장에도 좋지 않으며 사회적 계층이동성도 떨어뜨린다. 지나친 불평등은 정치적 영향력과 힘의 불평등으로 이어져 민주적 제도를 위협할 수 있다. 이강국 지난 2012년 기준 우리나라 소득 최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약 45%를 차지한다는 조사(김낙년 동국대 교수 연구)가 있는데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가? 피케티 한국은 이미 소득 불평등이 상대적으로 큰 나라다. 우려할만한 수준이다. 소득 최상위 10%를 기준으로 했을 때 미국에 견줘 다소 낮지만 일본이나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 견주면 훨씬 높은 편이다. 이강국 끝으로 <한겨레>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린다. 피케티 1990~2000년대 시장의 자기규제에 대한 너무 지나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공익 아래 두기 위한 민주적 장치를 재고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개인 재산의 노예가 되지 않고 반대로 그것들이 민주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해야 한다. 정리 류이근 기자, Daniel Sizer 인턴기자 ryuyigeun@hani.co.kr 사진=류우종 기자
한국보다 조세부담률 높아
누진세제, 가장 시장친화적으로
부와 권력 집중 막을수 있는 방법 한국 소득불평등 우려할 수준
소득 최상위 기준으로 볼때
미국에 견줘 다소 낮지만
일본·유럽보다 훨씬 높아 이강국 당신 책이 왜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는가? 피케티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도 불평등에 대한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본다. 책을 쓰면서 돈(자본주의)의 역사는 경제적이면서도 정치적, 사회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강국 당신은 불평등을 자본주의의 법칙들과 관련된 동학으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피케티 맞다. 순전한 경제 성장으로만 불평등의 동학을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치 않는다. 경제적 힘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확대 또는 감소시킬 수 있는 다른 힘들이 있다고 본다. 불평등의 역사를 본다면 실제 불평등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정책과 제도라고 본다. 책의 중요한 발견 가운데 하나는 20세기 불평등의 역사는 정치와 1·2차 세계 대전, 대공황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또 20세기에 채택된 누진과세 체제와 교육제도, 새로운 복지 자본주의 등을 통해 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후 레이거노믹스 등은 불평등의 동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금융 규제완화는 (불평등 확대에) 강력한 영향을 줬다. 미래는 우리가 선택하는 정책과 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선 역사를 살펴보는 게 매우 유용하다. 이강국 불평등 동학은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말인가? 피케티 경제 동학에서 불가피한 것은 없다. 경제 역사는 우리가 선택하는 제도와 정책의 역사다. 이강국 경제학자로서 당신의 방법론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다만 당신은 주류 학자들을 비판하며 정치경제학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자본과 노동의 대체탄력성 등 주류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어 약간 혼란스럽다. 피케티 선택의 문제에 불과하다. 경제적 모델과 이론은 우리가 신중하게 사용한다면 아주 유용하다. 문제는 때론 경제학자들이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이 거의 없는데 이론은 복잡한 것을 사용하는 경우다. 단순한 수학적 모델이 결코 세상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서 쓴다면, 약간의 이론적 모델은 도움이 된다고 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면 다층적, 사회적, 정치적 관점을 갖는 게 중요하다. 이강국 나도 경제학이 더 역사적으로 가는 방향을 선호한다. 경제학은 지금부터 바뀌어야 한다. 당신은 책에서 정치가 중요하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다시 통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한국이나 미국을 보면 정치 시스템에서 시민들의 요구가 대표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피케티 불평등의 역사나 민주주의나 과세 문제가 항상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한다. 때론 올바른 정책 개혁을 얻기 위한 사고나 폭력적 충격이 수반되기도 한다. 지난 세기 역사를 보면 이전에 거부됐던 많은 개혁들이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채택됐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에선 1914년 여름에 1차 세계대전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의회에서 누진소득세제를 채택했다. 전시 충격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그전까지 지배층은 원치 않았다. 불평등이 매우 크면 정치에 대한 부유층의 영향력이 확대된다고 본다. 불평등이 매우 커진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정치 시스템이 상당 부분 지배층에 의해 포획됐을 가능성이 있다. 내 책 우려하는 보수주의자들
불평등 자체를 우려해야
소수 지배층의 국부 독점이
성장에 필수적이란 증거 없어 시장의 자기규제 능력에 대해
1990~2000년대에 지나친 믿음
자본주의를 공익 밑에 두려면
민주적 통제장치 재고해야 이강국 한국에서 많은 비평가들이 당신의 책을 읽지도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호들갑을 떨면서 비생산적으로 논쟁하고 있다. 피케티 유감이다. 상상이 가는 면이 있긴 하다. 보수주의자들은 내 책에 우려할 게 아니라, 불평등 자체를 우려해야 한다. 불평등을 확대시킨 건 내가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불평등한 현실을) 부인만 할 게 아니라, 눈을 뜨고 직시해야 한다. 불평등 문제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탈냉전 세대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냉전시대에 살고 있다. 아마 (북한과 냉전 중인) 한국에선 그럴 수도 있다. 그런 태도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사유재산과 시장의 힘을 믿지만, 그건 민주적인 제도의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 이강국 불평등을 줄이려 할 때 자본수익률(r)을 낮출 게 아니라, 성장률(g)를 끌어올리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냐는 주장도 있다. 피케티 한국에서 나를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다.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성장을 해야 한다는 데 찬성한다. 자본수익률과 관련해서도 수익률을 떨어뜨리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부에 대한 누진세를 부과하기 원한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이 부를 쌓고 부의 이동성이 더 커질 수 있다. 나는 단지 부의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서 매우 큰 부에 대해서만 수익률을 떨어뜨리기를 원한다. 이강국 경제가 훨씬 더 역동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피케티 맞다. 나는 총체적인 부의 축적이 줄어들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자본축적은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본과 건물, 설비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유용하다. 다만, 성장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국부의 더욱 더 큰 몫을 소수의 지배층이 갖어야 가능하다는 보수적 관점은 내가 제시한 경험적, 이론적 증거와 부합하지도 않는다. 이강국 1990년대 불평등이 심화된 이후, 많은 연구를 보면 심각한 불평등이 성장률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나온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선 높은 불평등과 낮은 성장률이 악순환을 빚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와 증세 등을 포함한 경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유다.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했던 한국 정부는 최근 서민증세 논란을 낳고 있다. 피케티 한국이 소득세(법인세와 소득세를 묶어 쓴 듯)의 누진성을 더 강화할 수 있다고 본다. 누진세제는 가장 시장 친화적인 해결책이고, 부와 권력의 집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증세로) 늘어난 재원을 교육과 사회복지에 더 투자한다면 생산성 향상과 성장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 단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최선의 방법은 한국이 세수를 늘려 교육 등에 투자하는 거라고 본다. 통상적으로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많은 나라들이 한국에 견줘 조세부담률이 더 크다. 이강국 당신이 제안한 글로벌 자본세의 경우 아직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최근 국제기구 등에서도 변화가 느껴진다. 세금과 관련해서 당신이 보기엔 어떤가? 피케티 부동산 자산세를 놓고 보면 한국과 중국, 일본, 프랑스 등 한 국가 차원에서 더욱 더 강화될 수 있다. 한국도 부채가 많은 자산가엔 가볍게, 그렇지 않은 고액 자산가에겐 더 많은 세금을 매길 수 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개혁이다. 사람들이 부동산을 갖고 다른 나라로 도망갈 순 없지 않냐. 그런데 만약 고액 금융자산에 과세하려면 국제간 협조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이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주요20개국(G20)의 아젠다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이드라인 등이 국제 협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중요한 건 협력에 동참하지 않는 나라나 조세회피지역에 대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세금 문제는 공손하게 요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때론 무역제재도 필요하다. 이강국 꼭 유토피아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건가. 피케티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이강국 불평등이 왜 문제인가? 피케티 나는 어느 지점부터 불평등이 나쁜지 수학적 공식을 갖고 있진 않다. 용인될 수 없는 불평등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적절한 민주적 토론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불평등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책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19세기나 1차 세계대전 전과 같은 극단적 부의 집중과 불평등한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성장과 혁신에 유용할 수 있다. 문제는 어느 수준을 넘어선 지나친 불평등이다. 이는 성장에도 좋지 않으며 사회적 계층이동성도 떨어뜨린다. 지나친 불평등은 정치적 영향력과 힘의 불평등으로 이어져 민주적 제도를 위협할 수 있다. 이강국 지난 2012년 기준 우리나라 소득 최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약 45%를 차지한다는 조사(김낙년 동국대 교수 연구)가 있는데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가? 피케티 한국은 이미 소득 불평등이 상대적으로 큰 나라다. 우려할만한 수준이다. 소득 최상위 10%를 기준으로 했을 때 미국에 견줘 다소 낮지만 일본이나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 견주면 훨씬 높은 편이다. 이강국 끝으로 <한겨레>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린다. 피케티 1990~2000년대 시장의 자기규제에 대한 너무 지나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공익 아래 두기 위한 민주적 장치를 재고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개인 재산의 노예가 되지 않고 반대로 그것들이 민주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해야 한다. 정리 류이근 기자, Daniel Sizer 인턴기자 ryuyigeun@hani.co.kr 사진=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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