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직무대행(상근 부회장)이 지난 23일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열린 ‘경총포럼’ 인사말을 통해 느닷없이 “(기업인에 대한) 무분별한 배임죄 적용을 제한하고 기업인 사면을 단행하는 특단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도 높은 발언을 꺼냈다.
경총이 한달에 한번꼴로 여는 포럼의 이날 초청연사는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피케티 <21세기 자본> 감상법’을 주제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날 포럼에는 이채욱 씨제이(CJ) 부회장 등 기업 최고경영자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튿날 신문들엔 김 대행의 발언이 눈에 띄게 실렸다. 정작 포럼의 본래 목적이었던 조 전 수석의 강연 내용은 작게 묻히고 말았다.
이날 김 대행의 발언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노사분규가 잇따라 터지던 1970년 설립된 경총은 1991년 국제노동기구(ILO)에 정회원으로 가입하고 중앙 임금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등 ‘중앙 사용자단체’로서 그 성격과 위상이 명확하다. 그런 본업과는 거리가 먼 사안에 직설적이고 강경한 목소리를 내며 정부와 맞선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다. 김 직무대행은 지난 7월 경총포럼에서도 정부의 사내유보금 과세 방안을 작심하고 비판한 바 있다.
경총 관계자는 “배임죄 문제에 해당되는 기업인 당사자가 우리 회원으로서 회비를 내고 있다. 회원사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며 “요즘 회원들이 ‘경제단체 간에 영역을 따질 때가 아니다. 배임죄를 놓고 모두 한목소리를 내야 할 국면이다’라고 한마디씩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표현은 우회적이었으나 대한상공회의소 쪽을 염두에 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대한상의는 손경식 회장 체제이던 지난해 4월, 최태원 에스케이(SK) 회장과 김승연 한화 회장에게 각각 적용된 횡령, 배임죄 관련 법원 판결 시점을 앞뒤로 회원 기업들을 대상으로 급히 설문조사를 벌여 배임죄 적용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지난해 8월 박용만 회장 체제로 바뀐 뒤부턴 기업인의 배임죄나 사면 얘기는 가급적 꺼내지 않는 게 방침”이라고 말했다. 대한상의가 태도를 바꿈에 따라 경총이 제 업무도 아닌 영역에까지 앞장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격이다.
아직 새 회장을 찾지 못해 회장 직무대행을 하고 있는 김 부회장의 이날 발언은, 동반성장 분위기 속에서 재벌 총수마다 자본과 기업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경제단체 수장을 한사코 맡지 않으려는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재벌 총수들은 뒤에 숨은 채, 직무대행 꼬리표를 달아 운신의 폭이 좁은데다 재벌 오너도 아닌 연구자(경제학 박사) 김 부회장이 재벌 총수들의 ‘입’ 역할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셈이다. 물론 김 부회장 스스로 이를 원치 않는 ‘악역’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투사’로서 경제단체장 이름을 빌려 소신을 설파하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지는 알 길이 없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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