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회장과 대표이사 등 임원들이 모의를 합니다. 장래 그룹 안에서 위상이 높아질 회사를 ‘2세들’에게 몰아주기로 했습니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헐값에 발행해 이를 2세들에게 나눠줍니다. 이를 인수한 2세는 회사의 최대주주가 됩니다. 신주인수권부사채란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발행회사의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사채를 일컫습니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새로 발행한 주식의 제값을 받지 못한 탓에 수백억원의 손해를 봅니다. 반면 2세들은 훗날 수조원의 상장차익을 얻습니다.
1999년 1~2월 삼성그룹 안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이를 ‘삼성에스디에스(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회장은 이건희씨였고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이 그의 2세들이었습니다. 이학수 전 삼성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전 구조본 사장, 김홍기 전 삼성에스디에스 사장, 박주원 전 삼성에스디에스 경영실장이 이 과정을 통해 2세 승계를 실행에 옮긴 자들입니다.
이건희 전 회장 등에겐 배임죄로 징역형이 선고됐습니다. 이들은 회사의 손실 200여억원을 배상했습니다. 국세청엔 400여억원의 증여세를 냈고 불법 상속에 사죄한다며 8000억원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이들은 충분히 죗값을 치르고 범죄를 통해 얻은 이익을 반환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104명의 국회의원들이 새로운 법을 만들었습니다. 여야 국회의원 104명이 동의하고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앞장선 ‘특정재산 범죄수익 등의 환수 및 피해에 구제 관한 법률안’(이하 이재용법)이 지난 17일 발의됐습니다. 사람들은 이 법률안을 ‘이학수법’이라고 부릅니다. 이학수 전 구조본부장은 유죄 판결도 받았고 동시에 1999년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발행 당시 가장 많은 몫을 챙겼기에 누가 봐도 이 법의 ‘1차 대상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법은 ‘이재용법’에 더 가깝습니다. 그 까닭을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서진 삼남매가 2012년 6월1일 오후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걸어들어오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환수 대상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이재용법에서 환수 대상이 되는 ‘특정재산 범죄’란 횡령과 배임(업무상 횡령·배임 포함)으로 얻은 재산상 이익이 50억원 이상인 죄를 말합니다. 현행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서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처벌하는 특정재산범죄 가중처벌의 기준액(50억원)을 ‘마지노선’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럼 범죄로 얻은 ‘재산상 이익’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법률안을 보면 “
특정재산 범죄에 해당하는 범죄로 생긴 수익과 이들 수익에서 유래한 재산을 포함하며 이를 처분해 얻은 재산도 포함한다”고 나와있습니다.
삼성SDS BW 헐값 발행 사건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건희 회장 등은 1999년 1~2월 7150원의 행사가격(7150원에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가격)에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발행했습니다. 이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인수한 이재용 남매 등이 취득할 수 있는 주식은 모두 321만6780주였습니다.
비상장회사였던 삼성SDS의 당시 장외거래가는 5만5000원 안팎이었습니다. 물론 법원은 실거래가 5만5000원을 적정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 파기환송을 거친 끝에 서울고법이 인정한 행사가격의 적정가는 1만4230원이었습니다. 결국 이건희 회장 등이 회사에 끼친 손해는 227억7480만2400원으로 책정됐습니다. 법원이 인정한 삼성SDS 주식의 실거래가 1만4230원에서 이재용 남매 등이 취득한 주식의 행사가격 7150원을 뺀 주당 7080원의 부당 이득에 이재용 남매 등이 취득한 주식 321만6780주 숫자를 곱한 금액입니다. 특정재산범죄인 삼성SDS 헐값발행 사건으로 발생한 수익은 결국 227억원인 셈입니다.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헐값 발행에 대해 유죄를 선고 받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2009년 8월1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을 빠져 나가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명진 기자
여기까지만 읽고 ‘이재용법’에 대해 “이미 범죄 수익을 반납했는데 이중처벌 아니냐”고 비판하는 분들은 법률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재용법’은 ‘이들 수익에서 유래한 재산’도 환수 대상입니다.
당시 300만주가 넘는 ‘신주인수권’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65만7432주, 그의 동생들인 이부진·서현·윤형 자매에게 각 47만5524주, 이학수 본부장에게 75만5244주, 김인주 사장에게 37만7622주씩 돌아갔습니다. 이 부회장 등은 2002년 2월 이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합니다. 그 사이 증자와 액면분할 등을 거친 까닭에 주식 전환을 통해
이들이 새로 소유하게 된 삼성SDS의 주식은 이재용 부회장이 219만1140주, 이부진·이서현 사장이 각각 158만5080주, 이학수 본부장이 251만7480주, 김인주 사장이 125만8470주에 이르렀습니다. (<재벌닷컴> 자료) ‘이재용법’은 이들 주식을 환수 대상으로 합니다.
■ 환수 금액은?
그렇다면 환수 금액은 어떻게 될까요. 삼성SDS는 2010년 삼성네트웍스, 2013년 삼성SNS를 합병합니다. <재벌닷컴> 자료와 박영선 의원실의 설명을 종합하면, 액면분할과 증자 등의 과정을 거쳐 2015년 2월 현재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SDS 전체 주식의 11.25%(870만주), 이부진·이서현 사장은 각 3.9%(300만주), 이학수 본부장은 3.97%, 김인주 사장은 1.71%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 관련 기사: 삼성SDS, 삼성그룹 내부거래 통해 기업 급성장 )
삼성SDS는 지난해 11월 증권시장에 상장됐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이 보유한 삼성SDS 주식의 가치는 25일 주가를 기준으로 2조4000억원에 이릅니다. 이부진·이서현 사장과 이학수, 김인주씨가 보유한 가치를 포함하면 7조~8조원에 이릅니다. 물론 이 금액 전부가 환수 대상은 아닙니다.
25일 주가를 기준으로 ‘이재용법’에 의해 환수할 수 있는 금액을 계산해보겠습니다. 1999년 헐값 발행을 통해 얻은 신주인수권부사채를 2002년 2월 주식으로 전환할 당시 이들이 보유한 신주인수권의 행사가격은 715원이었습니다. 주당 가격 7150원은 왜 갑자기 715원으로 뚝 떨어진 걸까요. 여기서 액면분할이 등장합니다. 주식의 주당 가격이 고가일 경우 소액 주주들이 주식을 구입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깁니다. 어떤 주식은 주당 가격이 몇 백만원을 호가하기도 하니까요.
예를 들어, 100만원짜리 주식이 있을 경우 액면분할을 통해 주당 1만원짜리 주식 100개를 만들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소액 주주들이 다시 주식을 구매하기 위해 몰리게 되고, 주식 거래가 촉진돼 주가가 오르게 됩니다. 주식을 보유한 이들의 재산도 자연스레 불어나게 됩니다. 삼성SDS는 2000년 7월 액면분할로 주가를 10분의 1로 줄였습니다. 자본금 28억원 증자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재용 부회장 등이 당시 주식을 구입하면서 들인 비용은,
이재용 219만1140주×715원=15억6666만5100원
이부진 158만5080×715원=11억3333만2200원
이서진 158만5080×715원=11억3333만2200원
이학수 251만7480×715원=17억9999만8200원
김인주 125만8470×715원=8억9980만6050원이 됩니다.
합계는
65억3313만3750원입니다.
이제 이 주식들의 현재 가치를 따져봐야겠지요. 25일 주가 27만6000원을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이재용 219만1140주×27만6000원=6047억5464만원
이부진 158만5080×27만6000원=4374억8208만원
이서진 158만5080×27만6000원=4374억8208만원
이학수 251만7480×27만6000원=6948억2448만원
김인주 125만8470×27만6000원=3473억3772만원이 됩니다.
합계는
2조5218억8100만원입니다.
따라서 삼성SDS 헐값 발행 사건에서 유래해 이재용 부회장 등이 소유하게 된 수익, 즉 현재가치와 구입비용의 차이는 2조5153억4786만6250원(=2조5218억8100만원-65억3313만3750원)입니다. 이재용법에 의해 환수할 수 있는 금액은
2조5153억4786만6250원입니다.
■ 누가, 어떤 절차를 통해 집행하나?
법이 국회를 통과해 성문화할 경우, 환수 대상 범죄 수익의 국고 귀속을 청구할 권한은 법무부 장관에게 있습니다. 법률안 5조는 “법무부 장관은 직권 또는 (일반인의) 신청에 따라 법원에 환수 대상 재산의 국고 귀속을 청구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후 과정은 민사재판과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환수 청구 결정은 서울중앙지법 합의부가 담당하며 법무부 장관이나 환수 대상 재산의 소유자는 법원 결정에 불복해 고등법원에 항고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에 재항고도 가능합니다. 환수 결정이 확정되면 집행은 검사가 합니다. 법률안은 집행 과정에서 검사가 영장에 의해 압수나 수색을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헐값 발행에 대해 유죄를 선고 받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2009년 8월1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을 빠져 나가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명진 기자
■ ‘소급 입법’이라 위헌이다?
이재용법의 핵심 중 하나는 부칙 2조입니다.
‘제2조(적용례) 이 법은 이 법 시행 전에 범한 특정재산범죄로부터 발생한 특정재산 범죄 수익 등을 환수하는 경우에도 적용한다.’
이 조항을 놓고 “소급 입법이라 위헌”이라는 의견들이 재계, 법조계 일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해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않는다”, “모든 국민은 소급 입법에 의해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헌법 13조가 근거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소급 입법=위헌’이란 등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소급 입법에도 (원칙적으로) 허용되는 소급 입법이 있고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소급 입법이 있습니다. ‘진정 소급 입법’과 ‘부진정 소급 입법’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쉽게 말해 진정소급입법은 이미 완성된 사실관계를 규제하는 것이고 부진정소급입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실관계를 규제하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부진정소급입법은 원칙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헌법재판소 1995.10.26 선고 94헌바12결정 등) 이재용법을 발의한 박영선 의원은 “범죄인이나 그 수혜자들이 수익을 소유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부진정소급입법”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미 소급입법을 적용해 시행중인 법률들도 많습니다. ‘전두환법’으로 불리는 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유병언법’으로 불리는 범죄 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도 ‘이 법 시행 전에 행한 행위에 대해서도 이 법을 적용한다’는 부칙이 있습니다.
소급 입법·진정·부진정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떠나 헌법과 상식에 기초해 위헌성 여부를 판단해 볼 수도 있습니다.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해야한다.” 헌법 23조 2항의 내용입니다. 재벌 총수가 2세에게 경영권을 넘기기 위해 배임을 저질렀고, 그는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결국 경영권 승계는 완성됐습니다.
범죄 수익을 통해 경영권을 손에 쥔 2세가 그 부와 권한을 누리는 것을 그냥 지켜만 봐야 할까요? 범죄를 통해 얻은 수익에서 유래한 재산을 헌법 13조가 보호하는 “박탈당하지 않는 재산권”으로 볼 수 있을까요? “공공필요에 의해 재산권의 수용과 사용을 법률로써 제한”(헌법 23조 3항)하는 게 법치주의 국가의 의무가 아닐까요?
그동안 삼성의 불법·편법 경영권 승계를 감시하고 비판했던 경제학자들의 견해도 조금씩 다릅니다. 이들의 견해는 아래 기사들로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경제와 세상]‘범죄수익 환수법’에 관한 단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252117145&code=990100
[김상조의 경제시평]‘삼성 저격수’가 이학수법을 우려하는 이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242056125&code=990100
■ 왜 이재용법인가?
이미 언급했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SDS 전체 주식의 11.25%를 보유한 최대주주입니다. 삼성SDS는 일감 몰아주기 등 갖은 편법을 통해 회사 가치를 키웠고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SDS를 통해서만 302배의 재산을 불렸습니다. (62억원 투자, 현재 1조8854억원 가치) 9조원에 이르는 이 부회장의 전체 재산 중 삼성SDS 주식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직 이재용 부회장은 아버지 이건희 회장에게 물려받을 재산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회장은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의 주식 약 13조3393억원어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재산들의 상속세는 6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재편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계열사 간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고 최근 ‘유행’하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 관련 기사: 이재용 삼남매, 에버랜드·SDS로만 12조원 벌어 )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도 이 부회장에겐 ‘실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재용법으로 환수 가능한 이 부회장의 재산은 ‘겨우’ 5872억원이지만, 이서현·부진 자매와 이학수·김인주씨의 몫까지 포함하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이재용의 삼성 체제를 확립하는데 필요한 돈을 국가가 ‘빼앗아’ 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 법을 이재용법이라고 부를 만한 이유입니다.
아직 이재용법이 갈 길은 멉니다. 박영선 의원은 지난달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4월 안에 국회에서 결론을 내리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소관 위원회 심사 과정과 본회의 의결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만, 법안 발의에 서명한 104명의 의원 중 새누리당 소속 의원이 4명이나 된다는 게 희망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 4명은 진영, 이한성, 노철래, 정희수 의원입니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