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이제 퇴장하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1990년대 데스크톱·노트북 컴퓨터, 2000년대 웹의 보급과 함께 도래한 디지털 시대에 “이제 문서를 종이에 출력해 읽는 풍경이 점차 희귀하게 될 것”이란 말은 예측을 넘어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2000년대 초 이후엔 대다수 관공서와 민간기업에서 전자결재가 확산하면서 ‘종이없는 사무실’은 더 가속화하는 듯했다. 이런 통념은 과연 현실로 나타나고 있을까?
19일 <한겨레>가 한국제지연합회, 조달청 등을 통해 ‘인쇄·복사용지’ 소비량 추이를 파악해본 결과, 최근 수년간 큰 폭의 변동은 관찰되지 않았다. 제지연합회에 따르면, 전체 인쇄용지(백상지·아트지·복사지) 국내 소비량은 2008년 224만5천톤 이후 2009년(215만9천톤), 2010년(223만8천톤), 2011년(220만3천톤), 2012년(214만9천톤), 2013년(213만2천톤)까지 소폭의 등락만 있을 뿐 추세적 변동은 감지하기 어렵다. 연합회 쪽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종이소비가 크게 줄었다가 회복된 뒤 점차 줄어드는 모습”이라며 “인쇄용지 가운데 대다수는 단행본 책 만드는 데 쓰이는 종이고, 책을 읽지 않는 풍토가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물론 인쇄용지 소비량은 디지털이라는 기술적 환경 외에 경기순환 사이클의 영향도 적지 않다.
복사용지는 전체 인쇄용지 소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10% 정도다. 제지연합회를 통해 복사용지만 따로 떼어 보니 복사용지(국내산) 판매량은 국내 생산이 시작된 2005년 7만6천톤 이후 2008년 16만3천톤, 2011년 15만2천톤이었다. 2011년에 수입 복사용지는 8만9천톤에 이른다. 수입분이 계속 늘면서 국산용지의 판매량이 다소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제지연합회 성기태 팀장은 “디지털 정보화에도 2011년까지 국내 인쇄용지 수요가 증가하다가 그 이후부터 점차 줄어드는 쪽으로 돌아선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 복사용지 대표 생산업체인 한국제지㈜ 쪽의 설명도 엇비슷하다. 2012년 한국제지의 인쇄용지 생산 판매량은 연간 60만톤(백상·아트지 약 70%, 복사지 약 30%)이다. 한국제지 서동식 팀장은 “디지털시대라고 해서 복사용지 소비량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건 아니다. 2012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2013년에도 60만톤가량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부터 전자정부를 대대적으로 구축한 관공서의 복사용지 소비량도 ‘의미 있는 변화’는 발견되지 않는다. <한겨레>가 조달청에 의뢰해 파악해보니, 공공부문(중앙부처·지방자치단체·공기업 등) 복사용지 납품수량은 2011년 118만8천 상자(10포·1포당 250매) 이후 2012년(120만3천), 2013년(115만7천), 2014년(109만9천)까지 미세한 변동만 있었다. 올해도 4월 말까지 42만6천 상자에 이른다. 사무실 컴퓨터에 연결된 프린터기를 통해 출력해 읽는 ‘익숙한 습관’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2013년 말 스마트폰 가입자가 3751만명에 이르는 등 모바일 시대의 도래로 복사용지 소비도 이제 변화의 도상에 들어선 형국이다. 지난해 국내 복사용지 소비량은 국내산 13만6천톤(전년 대비 -7.3%), 수입산 8만4천톤(-5.7%)으로 줄었다. 프린터기와 직접 연결해 쓰지 않고 화면으로 콘텐츠를 이용하는 스마트폰 사용 방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제지 서 팀장은 “2009년 이후 우리 회사 복사용지 판매량이 거의 일정했는데, 유독 지난해 25%가량 큰 폭으로 줄었다”며 “스마트폰의 영향이 본격화하는 시점에 들어선 것 같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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