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최치훈 사장이 지난 5일 직접 홍콩으로 가서 장기투자 성향의 외국계 기관투자가들과 협상을 시작한 것은 당장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간 합병은 물론 이재용 부회장 중심의 3세 승계 구도 구축을 위한 후속 사업구조 개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삼성이 외국계 기관투자가와의 타협에 성공하면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공세에서 벗어나면서 시장 신뢰를 높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반면, 실패하면 외국인 투자자 다수와 대립하면서 다음달 주주총회에서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네덜란드 연기금(APG) 등 삼성물산의 주주인 장기투자 성향의 외국계 기관투자가 30~40곳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합병 비율(1 대 0.35)이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네덜란드 연기금의 박유경 이사는 “삼성이 안정적인 3세 체제 구축을 위해 지배력을 강화하려 하고, 이를 위해 합병이 필요하다는 취지를 이해한다”며 “경영권 안정은 소액주주를 위해서도 필요한데, 다만 모든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공정하게 합병하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은 엘리엇이 합병 조건에 공개 반발한 사태는 사실상 삼성이 ‘초대장’을 보낸 데서 비롯했다고 인식한다. 박 이사는 “공정한 합병 비율은 외국인 투자자만을 위한 게 아니라 회사와 주주 모두를 위한 것”이라며 “엘리엇을 겨냥한 ‘먹튀 논쟁’ 같은 내셔널리즘적 주장은 시장과 삼성을 위해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박 이사는 “모든 펀드들은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투자 이윤을 내려 하는 목적은 같다”며 “합병 비율이 불공정한 상황에서 헤지펀드가 뛰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다른 곳들이 나서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라고 말했다.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은 엘리엇과 공동행동을 할 생각은 없다면서 독자노선 추구 방침을 분명히 했다. 한 외국계 투자자는 “엘리엇은 주총 이전이라도 주식을 팔고 나갈 수 있지만, 장기 투자자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주주가치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은 합병 비율 재산정 요구와 관련해 최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부당한 회사분할에 대해 주주가 반대하자 유예 결정을 내린 사례를 소개하며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추가로 합병 등 사업개편을 할 때 주주권익 보호 원칙을 분명히 하는 건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이들 대부분은 삼성물산뿐 아니라 삼성전자 등 삼성 주력사의 주식도 갖고 있다. 박 이사는 “삼성이 지난해 삼성중공업과 엔지니어링 간 합병이 주주 반대로 무산된 것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랐으나 삼성물산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며 “앞으로 제3, 제4의 사업개편이 이어질 텐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시점에서 삼성과 외국계 기관투자가 간의 협상 전망을 점치기는 쉽지 않다.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은 지난 3월 현대차 주총 때와 같은 윈윈의 성과를 기대한다. 이들은 당시 현대차의 한전 터 고가입찰 논란과 관련해 주주가치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했고, 현대차가 이를 받아들여 개선책을 내놓았다.
삼성은 장기투자 성향의 외국계 투자가들과는 적극 대화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삼성 안에서 강온 기류가 맞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합병 비율을 재산정할 경우 엘리엇 사태 이후 40%가량 급등한 현재의 주가를 단순 고려하더라도, 이재용 부회장의 합병회사 지분이 16.5%(종전 합병 비율 기준)에서 2~3%포인트 낮아지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삼성물산 임원은 향후 대응 방침과 관련해 “아직 공개할 게 없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합병 조건에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헤지펀드 엘리엇은 지난 5일 9.79%의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 등에 공동 보조를 요청하는 차원의 서한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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