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국책연구원들, 위상 전환기 맞아
KDI, 지위 하락 대응토론회 열며 고민중
개발연대 지나고 민간 시장영역 확대
정책연구 영역·대상 위축…자긍심 훼손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정부출연금 축소
‘국책연구’ 본업 외 “돈벌이 용역 수행중”
정책보고서 3년간 1683건→1268건
공무원-연구원 ‘정책 밀착’ 떨어져
정부출연 넘어 ‘반관 반민’ 어정쩡
“민간과 ‘연구경쟁체제’로 갈 필요”
KDI, 지위 하락 대응토론회 열며 고민중
개발연대 지나고 민간 시장영역 확대
정책연구 영역·대상 위축…자긍심 훼손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정부출연금 축소
‘국책연구’ 본업 외 “돈벌이 용역 수행중”
정책보고서 3년간 1683건→1268건
공무원-연구원 ‘정책 밀착’ 떨어져
정부출연 넘어 ‘반관 반민’ 어정쩡
“민간과 ‘연구경쟁체제’로 갈 필요”
2010년 2월25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제48차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서울 홍릉에 있던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열었다. 현직 대통령의 한국개발연구원 방문은 27년 만이었다. 회의를 마친 뒤 이 대통령은 연구원 연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본관 2층 현판에 “KDI가 새로운 시대에도 앞서가는 조직으로 발전하고, 대한민국의 선진화에도 앞장서 주길 바란다”는 방원 기념 메시지를 남겼다. 이에 대해 한국개발연구원의 내부 소식지 ‘케이디언스’(KDIans)는 2010년 봄호에 “이 메시지는 향후 KDI의 진로 설정에 있어 무거운 책임의식을 갖게 한다”고 적었다.
1972년 한국개발연구원 설립을 시작으로 70·80년대 잇따라 생겨난 경제 분야 국책연구원들은 산업화, 개발의 연대에 한국 경제 발전의 밑그림을 그리고 중장기 정책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구실을 자임해왔다. 한국개발연구원·산업연구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국토연구원·한국농촌경제연구원 등 국책연구기관들은 대부분 경영목표로 ‘국가 어젠다 및 정부 정책에 대한 선도적 연구’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5년 전 이 전 대통령이 남긴 국가 어젠다와 정부 정책을 선도하는 기관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의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한국개발연구원 소속 정규 연구자들(200여명) 사이에 감돌고 있다. 침묵 속에 술렁이게 하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질병’은 정책연구 담당자로서의 깊은 무력감이다. 바야흐로 10여개에 이르는 경제 분야 국책연구원마다 그 위상과 지위, 수행하는 역할에서 커다란 전환의 도상에 들어서 있는 형국이다. 기관들이 올해 들어 세종시 국책연구단지와 나주·울산 등지로 대거 이전되면서 직장 소재지에 따른 매력도가 떨어진 건 부차적 요인일 뿐이다.
어느 연구기관 가릴 것 없이 ‘국책연구’라는 본업 이외에 외부로부터 돈을 받고 수행하는 수탁 용역과제를 연구자마다 한 건 이상씩 수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연구기관의 성격도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반관반민’의 어정쩡한 처지로 변화하고 있다. 지난해엔 한국개발연구원 등이 갈수록 약화되는 국책연구기관의 위상 문제를 놓고 대학교수 등과 토론회를 열며 고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 국책연구원 연구자는 “정부 쪽은 정책연구를 소홀히 한다고 우리한테 불만이고, 꼭 경쟁자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민간 기업경제연구소의 연구 역량도 높아지고 있다. 대학과 학회 등 민간에서는 국가정책 연구도 국책연구원의 수요 독점을 깨고 시장에서 경쟁입찰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최근, 경제 분야 연구기관에서 20~30년 근속한 선임연구위원들을 대상으로 국책연구기관의 현주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정책연구 위축…정부출연금도 삭감
1970년대 한국개발연구원이나 중동문제연구소(현 산업연구원) 등이 설립될 당시 국책연구기관은 석·박사급 고급 두뇌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국가정책에 기반한 개발의 연대는 흘러간 옛날이 되었다. 한국 경제 각 방면에 ‘민간 시장영역’이 확대되는 반면, 공적 정책 연구의 영역과 대상은 축소되면서 국책연구기관들의 역할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지금은 연구자마다 쉽고 편한 연구과제만 하려 들고 진지한 정책과제를 떠맡으려는 사람이 적다.”(KDI) “경제에서 차지하는 농업 부문이 대폭 줄어들어 내가 20년 넘게 담당해온 연구과제의 가치와 필요성이 퇴색하고 있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경제발전계획도 사라지고 국토발전종합계획의 유용성을 놓고 회의적인 얘기도 나온다. 국가정책 연구자로서의 보람과 긍지도 엷어지고 있다.”(국토연구원)
‘시장 영역의 질주’라는 외부 제약환경 이외에, 내부로 눈을 돌리면 30~40년 국책연구원 역사에서 격동기는 외환위기 전후였다. 각 정부부처 산하에 있던 총 23개 경제·사회 분야 국책연구원들은, 1999년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이하 연구회)가 출범하면서 모두 연구회 소속으로 편제됐다. 정부의 출연연구기관 경영 혁신 방침에 따른 것으로, 연구회가 연구원들에 대한 ‘지원·육성’을 표방했으나 사실상 체계적으로 관리(평가·감독·통제)하는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연구환경은 구조조정기에 들어섰다.
연구회는 정부출연금을 줄이고 대신에 부족분은 더 많은 외부 수탁 용역 연구를 수행해 자체 수입으로 충당하라고 해마다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2015년 예산을 보면, 정부출연금과 자체 수입은 각각 한국개발연구원 396억원·233억원, 산업연구원 196억원·109억원이고, 한국농촌경제연구원(160억원·288억원)과 국토연구원(193억원·487억원)은 자체 수입 비중이 더 많다. 한국개발연구원의 경우 정부출연금은 2000년 127억원, 2005년 295억원, 2010년 500억원이었다가 올해 396억원으로 줄었다. 2010년까지는 증가한 이유도 한국개발연구원 본연의 국책 기본 연구사업보다는 경제교육·국제정책대학원·공적개발원조(ODA) 같은 신설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자체 수입은 같은 기간 54억원, 46억원, 185억원, 255억원으로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
연구회는 개별 연구기관의 인건비 중 정부출연금 보조 비중도 차등을 두고 있다. 국토연구원은 이 비중이 47%다. 나머지는 외부 수탁 연구로 조달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국책연구과제 수주에도 경쟁체제가 도입됐다. 각 연구원이 정책연구제안서를 연구회에 제출하면 경쟁입찰을 거쳐 선정하는 식으로 국가정책 연구를 둘러싼 환경이 급변했다.
연구자마다 외부 돈벌이 과제 수행
국책연구기관의 연구활동은 정책 관련 기본(고유)연구과제, 현안 이슈 페이퍼, 외부 수탁 과제 등으로 나뉜다. 기본연구는 기획재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아 6개월~1년짜리 연구주제 30~50건가량을 선정해 수행한다. 과제당 5천만원 안팎의 출연금 예산이 투입된다. 외부 수탁 연구는 정부 부처 산하기관, 지방자치단체 및 민간 협회로부터 주로 발주받아 수행하는 용역과제다. 산업연구원 연구자는 “우리 연구원 소속 거의 모든 연구자가 자체 돈벌이 목적의 용역과제 한두 건을 맡아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들 외부 수탁 연구에 매달리면서 국가정책 연구 보고서 생산은 줄고 있다. 경제·사회 분야 23개 국책연구기관이 생산한 보고서는 2000년 641건, 2005년 850건, 2010년 1103건, 2011년 1683건으로 늘었으나 그 뒤부턴 2012년 1617건, 2013년 1535건, 2014년 1268건으로 감소하고 있다. 산업연구원 경영관리부서 쪽은 “정부 출연금 보전 비율이 갈수록 줄어 수탁 용역 연구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자체 수입액은 연구회가 최근 3년치 실적을 가중평균해 제시하기 때문에 매년 증가 일로에 있다”고 말했다. 금전적 인센티브를 동원해 수탁과제 수행을 독려하기도 한다. 외부 용역 과제의 경우 용역 금액(순부가가치 기준)에 따라 실적을 점수화한 뒤 개별 연구자의 연봉에 반영하는 것이다. 외부 과제 수행은 정책연구 기반 자체를 위협한다. “외부 수탁 과제로 자체 수입을 올리는 데 골몰하다 보니 진지하게 국가정책 연구를 고민하며 오랫동안 들여다보기 어려운 상황이고, 다들 하기 편한 연구에만 매달리는 현상도 나타난다.”(산업연구원)
정부 경제관료의 인식·의존도 퇴색
연구회가 출범한 1999년부터 올해 7월까지 23개 국책연구원이 생산한 ‘국책연구’는 정책·연구자료 2814건, 각종 연구보고서 1만5573건이다. 그러나 총 1만8천여건에 이르는 정책연구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 경제관료들이 입안하는 정책에 실제로 반영되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연구자들 사이에 커지고 있다. 연구원마다 해마다 경영목표로 “정부 발주 연구용역의 정책활용도를 높여야 한다”고 외치고 있을 정도다. 정부 부처 공무원과 국책연구원 사이의 ‘정책 밀착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90년대 이후 대학의 연구 역량이 성장하고 경제 담당 공무원들의 박사학위 취득도 늘면서 국책연구원에 대한 의존이 줄었다. 관료들의 태도도 예전과 달리 정책연구 보고서의 내용과 성과물에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KDI)
공무원 박사학위자가 증가했지만 중장기 정책 비전·대안에 대한 관료들의 이해가 떨어진다는 점도 지목된다. “경제부처 공무원의 담당 업무가 2~3년마다 수시로 바뀌면서 연구기관이 내놓은 해당 정책보고서를 제대로 검토할 만한 업무 전문성도 떨어지고 있다.”(농촌경제연구원) 일본의 경우 국토교통성 안에 국토교통정책연구소가 존재하는 등 각 행정부처 내부에 공무원이 직접 연구자로 활동하는 조사·연구 조직이 별도로 있다. 건축연구소나 토목연구소처럼 정부 발주 국가정책 연구를 대행하는 ‘반관반민’ 연구조직까지 있다. “우리나라 공무원은 머리는 좋지만 국회 보고 등 정치적인 일로 매일 바쁜데 앉아서 차분하게 정책을 고민할 형편이 안 된다.”(국토연구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장으로 이미 권력이 넘어갔다”고 말했듯 시장이 한국 경제를 주도하고, 정부가 정책적으로 직접 지원하거나 규제할 수단이 대폭 축소되고 있는 것도 국책연구기관의 우울한 풍경을 초래하는 요인이다. “우리 경제에서 정책을 입안·집행하는 경제관료의 역할이 줄어든 것도 불가피하게 국가정책 연구보고서의 활용도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산업연구원)
물론 보고서 품질에 대한 불만도 한 가지 이유로 작용할 터다. 한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대학교수는 업적 평가와 재임용 심사라도 받지만 국책연구원 정책연구 보고서를 보면 수월한 보고서 한 편 써놓고 나서 내용이 정책에 수용되든 말든 나 몰라라 하는 태도도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치세력의 주기적 변동도 영향
노무현 정부 때는 장기 국가비전 과제 수립을 국책연구기관들에 맡겼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는 한국개발연구원 주도 아래 양극화 해법을 포함한 사회·경제 분야 ‘비전 2030’ 마련을 위해 10여개 국책연구기관을 총동원해 6개월 이상 작업에 들어간 바 있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국책연구원에 대한 정부의 정책 수요 및 요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국개발연구원을 상징적으로 방문했으나, 한 연구자는 “이명박 정부 당시엔 대통령부터 ‘내가 해봐서 다 안다’면서 국책연구기관에 대한 관료들의 의존이 크게 떨어졌다”고 털어놓았다.
4대강 사업처럼 정부 요구대로 정책보고서를 써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연구자로서의 자긍심이 훼손되는 일도 적지 않다. 관료들은 정치세력 향배에 보조를 맞춰가며 정책 방향을 쉽게 바꾸기도 한다. “정치적 주문에 따라 집권 5년 안에 당장 성과를 낼 만한 정책 연구에 급급하다 보니 중장기 경제 비전을 제시하는 연구를 하기 어렵다.”(KDI)
민간 연구시장과 경쟁체제 필요
국책연구기관이지만 연구원의 성격과 역할이 과거와 달리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연구과제 수행이 용역화됨에 따라 고객·시장 지향적 연구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과다한 정부출연금 지원은 그만큼 연구 주제와 내용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이해 대변을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양면성이 있다. “정책 연구에서 정부에 전속돼 쌍방독점하는 담합 구조보다는 대학·민간연구소와의 ‘연구경쟁 체제’로 갈 필요도 있다.”(KDI)
‘시장의 시대’이지만, 경제와 시장 구조가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더 정교한 정책 패키지가 요구되는 만큼 국책연구기관의 위상이 강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시장 영역이 확대될수록 정부 정책이 개입·통제해야 할 지점도 커진다. 시장과 정부 정책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전략을 조직적·체계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정책공학 능력이 뛰어난 국책연구자의 역할이 더 커졌다.”(국토연구원)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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