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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제주 귤 잔혹사, 헛농사에 울고 땅장사에 울고

등록 2016-01-03 20:03수정 2016-01-0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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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대표 과일 귤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올겨울 가격이 심하게 폭락해 상당한 양의 귤이 제주도의 밭을 벗어나보지도 못한 채 버려질 판이다. 제주도는 지난여름 ‘제주감귤 혁신 5개년 추진계획’까지 발표했지만, 농가들의 위기감은 커져만 가고 있다. 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올겨울 귤값 대폭락…수확 포기 속출
한창 수확기에 때아닌 겨울장마
볕든 뒤 수확 몰려 시세 폭락 이어져
제주도 긴급수매 나섰지만 효과 의문

귤농사 어려움 앞으로 더 커질 듯
수입과일·겨울딸기와 경쟁 치열
소비자 취향도 급속히 다양화
천혜향 등 신품종도 미래 불확실

외지인 투기 붐에 땅값 치솟는데
임대농은 수지타산 안 맞아 속앓이
자영농은 땅 팔아야하나 싱숭생숭
생산 구조조정 정책 추진 시급해

15세기 후반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제주목조를 보면, 제주에서는 금귤, 산귤, 동정귤, 왜귤, 청귤이 재배됐다고 한다. 이들 재래종은 당시엔 나라님 진상용으로 쓰이는 귀한 과일이었다. 하지만 상품성이 떨어졌던 탓에 조선왕조 몰락 이후 맥이 끊겼다. 지금 우리가 흔히 먹는 노지 감귤은 ‘온주’라는 품종으로 일제가 들여온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귤농사가 번성하지는 못했다. 일본 귤이 수입됐기 때문에 제주 귤이 설 자리가 없었다. 해방 뒤에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의 귤나무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귤나무가 다시 주목받게 된 건 1960년대부터다. 시장경제가 자리를 잡았고, 국교가 끊긴 일본의 귤은 수입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처럼 귤이 귀해졌다. 소득 수준이 오르면 과일에 대한 소비 수요가 커지기 마련이다. 1970~80년대를 거치며 서귀포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던 귤나무가 순식간에 제주 전역으로 퍼졌다.

육지의 농부들은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냈지만, 제주에서는 귤을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귤나무는 ‘대학나무’라는 별명도 얻게 됐다. 서귀포에서도 가장 귤이 많이 나는 남원읍에서 귤농사를 짓는 부모 밑에서 자라 대학을 나오고 고향을 떠났다가 2010년 귀향해 귤농사를 짓고 있는 장태욱(47)씨는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귤나무가 어느 정도 있는 집들은 다들 풍족하게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2015년 12월 전국 공판장에서 귤의 평균 경락가격은 10㎏당 9527원까지 떨어졌다. 2015년 10월1일부터 12월26일까지 평균가격은 10㎏당 1만764원으로, 가격이 안 좋았던 2014년산보다도 5%, 2013년보다는 21%나 낮았다. 농민들은 10㎏당 1만3000~1만4000원은 돼야 영농비라도 건진다고 말한다. 비상사태다.

올겨울 귤값이 폭락한 가장 큰 이유는 이상기후 탓이다. 정상적인 귤 수확기는 11월10일부터 12월15일 사이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제주에서는 한달 중 20일 가까이 비가 왔다. 비 맞은 귤을 따서 저장하면 금세 썩어버린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한 농민들이 비 맞은 귤을 수확했고, 썩은 귤이 많이 나오면서 가격이 폭락했다. 날씨가 개기를 기다렸다 수확한 품질 좋은 귤은 한꺼번에 많은 물량이 쏟아져나오니 가격이 오르지 못한다. 지금 가격으로는 인건비도 안 나오니 나무에 매달린 채 썩어가게 아예 손을 놓고 있는 농가도 많다.

장태욱씨는 “이번 수확기에 열린 귤이 4000상자(10㎏들이)가량인데 지인들 직거래로 간신히 1000상자 정도 팔았다. 저장고에 1500상자가 들어가 있고, 나머지 1500상자 분량은 나무에 그대로 달려 있다. 이걸 팔 수 있을지, 여기서 썩어 없어질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허규 농협제주본부 감귤팀장은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아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11월에 비가 많이 오면서 재해 수준으로 상황이 나빠졌다. 2014년에도 날씨 때문에 가격이 안 좋았는데 2015년에 더 떨어졌다. 2년 연속 이러면 농가들은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제주도는 12월에 품질이 떨어지는 귤 4만톤을 수매해 시장에서 격리하는 등 긴급대책을 내놓았지만 뚜렷한 성과가 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사실 날씨만 문제라면 다음 겨울을 기약하며 쓰린 속을 달랠 수 있다. 하지만 귤은 더 깊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과거 겨울과일인 귤의 경쟁 상대는 가을에 수확해 겨우내 저장하는 사과, 배, 감이 전부였다. 하지만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 시장 개방의 결과 수입과일이 밀려들어왔다. 한국무역협회 통계를 보면, 과일·채소 수입액은 10년 사이 3배가량 늘었다. 이제 귤은 오렌지, 자몽, 키위, 망고, 블루베리 등 다양한 수입과일과 경쟁해야 한다.

국내산 과일도 귤을 위협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딸기다. 제주도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노지 감귤 출하 시기(10월~2월)에 딸기·토마토 등 과채류 출하량이 매년 12%씩 증가했다. 이마트 과일 담당 신현우 바이어는 “예전에는 딸기가 주로 나는 시기가 2~3월이었다. 하지만 겨울에 강한 ‘설향’이라는 품종이 개발돼 보급되면서 최근 3~5년 사이 딸기 출하 시기가 12월~1월로 당겨졌다. 귤이 딸기에 치이고 있다”고 말했다. 원희룡 제주지사도 지난해 5월 ‘감귤 안정생산을 위한 구조혁신 방침 5개년 과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제주 감귤산업은 딸기 등 경쟁과실의 등장과 자유무역협정 파고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제주 농가들은 신품종으로 돌파구를 모색해왔다. 2000년대 중반부터 귤보다 늦게 수확하는 만감류 재배가 본격화됐다. 한라봉이 시작이었다. 2005년 1만5300톤이던 한라봉 수확량은 10년 만인 2014년 4만6069톤으로 3배 늘었다. 2005년에는 오렌지와 밀감을 교잡한 천혜향이 등장했고, 2013년에는 한라봉과 천혜향을 교잡해 만든 황금향, 레드향이 나왔다. 조순영 제주감귤출하연합회 계장은 “지금도 신품종을 찾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만감류는 귤과 달리 소비자한테 귀한 과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나 갈지 모른다. 만감류 중 가장 먼저 선보인 한라봉은 최근 소비자가 별다른 매력을 못 느끼면서 이미 수명이 다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비닐하우스 시설비가 반영된 비싼 가격도 부담이다. 신현우 바이어는 “제주산 만감류는 소비자가격이 개당 2000~2500원이다. 비싸지만 고급 과일이라는 인식 덕분에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서 시장이 커지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귤의 품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타이벡귤’이다. ‘타이벡’은 미국 듀폰사가 만든 건축용 방수지의 제품명이다. 이 방수지를 귤밭에 깔면 열매들이 바닥에서 반사되는 햇빛까지 쪼일 수 있고, 빗물이 밭에 스며들지 않는다. 단맛은 더하고 신맛은 덜한 귤이 열린다. 하지만 이 역시 비용이 만만치 않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전체 과일 소비량이 늘지만, 선호하는 과일도 다양해진다. ‘국민 과일’로 꼽히는 품목들은 소비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공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제주도가 지난해 발표한 감귤혁신 5개년 계획의 핵심도 ‘적정생산’이다. 이미 제주도의 감귤 재배면적은 2000년 이후 약 20% 줄었다. 노지 감귤 출하량도 최근 10여년 사이 70만톤대에서 55만~60만톤으로 줄었다. 앞서 일본은 1973년 339만톤에 이르던 귤 생산량을 2013년 90만톤까지 줄였다. 이마트 신현우 바이어는 “유통하는 입장에서 보면 45만톤 밑으로 내려가는 게 맞다고 보지만, 그만큼 생산량을 줄이려면 거액의 예산을 들여 나무를 뽑는 농가에 보상을 해줘야 한다.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인다”고 말했다.

‘감귤 구조조정’은 의외의 방식으로 일어날지도 모른다. 제주도의 부동산 가격은 외지인들의 투기 붐으로 무섭게 치솟고 있다. 땅을 임대해 귤농사를 짓는 농가들은 귤값이 이번처럼 떨어지면 농사를 계속하기 힘들다. 장태욱씨는 “내가 5년 전에 밭을 구입할 때 평당 15만원을 줬는데, 요즘 7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부르며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농가 수익은 최근 5~6년 중 최저 수준이다. 아무리 땅을 아끼고 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곤궁해지면 땅을 파는 걸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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