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치 떨리게 한 임금님의 과일
진상용 재배 왕조몰락과 함께 사라져
진상용 재배 왕조몰락과 함께 사라져
귤이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보면, 일본의 고대 문헌인 <비후국사> <고사기> <일본서기> 등에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제주도에서 귤이 재배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1052년 탐라에서 세공으로 바치던 감귤의 양을 100포로 늘린다는 기록이 있고, <태조실록>에는 이전까지 나라에서 ‘상공’으로 받아가던 감귤을 ‘별공’으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상공은 물종과 수량을 일정하게 해마다 바치는 공물이고, 별공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부과하는 공물이다. 지금이야 노점에서 몇천원이면 봉지 한가득 살 수 있는 흔해빠진 귤이지만 조선시대까지는 귀한 과일이었다는 얘기다.
조선시대엔 제주도에서는 해마다 동지가 되면 임금에게 귤을 진상했고, 임금은 답례로 제주목사에게 베와 비단 등을 하사했다. 제주에서 귤이 올라오면 성균관과 동·서·남·중 사학의 유생들에게 과거를 보게 하고 귤을 나눠주었는데, 이를 감제 또는 황감제라고 불렀다.
나라님이 귀하게 여기면 백성들은 괴로운 법이다. 1601년 제주에서 발생한 모반사건으로 인해 처벌될까 두려워하던 제주도민을 달래기 위해 안무어사로 파견된 조선 중기 문신 김상헌이 남긴 <남사록>에는 “해마다 7, 8월이면 목사는 촌가의 귤나무를 순시하며 낱낱이 장부에 적어두었다가, 감귤이 익을 때면 장부에 따라 납품할 양을 조사하고, 납품하지 못할 때는 벌을 주기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민가에서는 재배를 하지 않으려고 나무를 잘라버렸다”고 적혀 있다. 관리들 몰래 귤나무를 죽이기 위해 뿌리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나무그루에 상어 뼈를 박아넣거나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후춧가루를 넣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제주의 귤나무는 사실상 버려졌다. 공물로 바칠 일이 없으니 식량이 되지 않는 귤농사를 지을 이유가 없었다. 귤농사 암흑기는 과일 소비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전까지 이어졌다.
유신재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