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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헛된 기대

등록 2016-05-04 14:09수정 2016-05-05 09:36

이경 선임기자의 ‘이로운 경제’
박 대통령 ‘긍정검토’ 발언후 새 국면 맞은 ‘한국판 통화완화정책’
경제팀 ‘유일호호’ 구실 중요한 가운데…믿음이 가지 않는 이유들
‘한국판 양적완화’ 논의가 애초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총선 당시 이 논의에 시동을 걸며 한 말은 이랬다. “우리도 이제는 중앙은행이 (선진국처럼) 기준금리정책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시중자금이 막혀있는 곳에 통화가 공급될 수 있도록 통화정책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강 위원장은 그러면서 한국은행에 ‘한국판 통화완화정책’을 주문했다. 한은이 산업은행의 기업 구조조정 작업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산은채권을 인수하고, 가계 주택담보대출 기간을 20년으로 늘릴 수 있도록 주택담보대출증권을 인수하라는 것이다. 부실기업과 가계부채 문제 해결이 중요하고, 한은 통화정책이 소극적이라 아쉬웠기에 나는 이런 제안에 적잖은 기대를 걸었다. 이참에 여야와 정부, 한은이 다른 구조적 현안들과 연계해 큰 틀에서 우리경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했다.

지금 한국판 양적완화론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새누리당의 총선 참패로 잊혀지는가 싶더니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28일 국무회의 발언이 나오며 큰 힘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기업 구조조정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한국판(또는 선별적) 양적완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발언을 계기로 정부는 몇몇 부실 조선·해운 업체 정리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실무적으로 담당할 산은과 수출입은행의 자본금을 확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문제는 강 위원장이 처음 제시한 것과는 딴판이라는 점이다. 기업 구조조정의 범위가 대폭 축소되고, 가계부채 구조조정은 아예 거론도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말이 무색하게 됐다. 현실을 잘 모른 채 우리경제의 미래청사진을 마련하는 돌파구가 되길 바란 나는 공연히 헛물만 켠 셈이다.

개인적으로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지만 어쨌거나 정부가 구상하는 부실 조선·해운 업체 정리가 소기의 성과를 내면 좋겠다. 이번 기회에 우리경제를 옥죄는 불확실한 요소 가운데 일부라도 해소하고 이들 산업의 지속가능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자면 정부, 특히 경제팀 수장인 유일호 경제부총리의 구실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썩 믿음이 가지 않지만 말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유일호 경제부총리.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우선 조선과 해운 산업의 부실 규모가 어느 정도이고 이를 정리하는 데 얼마의 돈이 필요하며 구조조정을 하고 나면 경쟁력 확보가 가능한지 궁금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설명이 없다. 너무 앞서가는 요구인가? “신속한 기업 구조조정으로 환부를 깨끗이 수술해 우리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을 시대적 소명”으로 삼고 있다는 그의 발언(28일 경제관계장관회의)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면 지금 개략적인 설명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있다. 한은을 상대로 산은과 수은에 출자하거나 채권을 매입하도록 압박하면서 논리적 근거를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 또한 문제다. 그가 2일 기자간담회에서 한은이 출자 등의 전제조건으로 ‘사회적 합의’나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국민적 공감대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대목은 그냥 넘기기 어렵다.

유 부총리가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부정적인 것도 그렇다. 현행 법으로 추경 편성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구조조정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국회를 설득하거나 관련 법을 고치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한은에 돈을 내라고 하니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업대책 마련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유 부총리는 정부가 추진중인 노동개혁법의 입법으로 갈음할 수 있다는 취지의 얘기를 하고 있다. “노동개혁법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자 지원을 강화하고(고용보험법), 실업자들이 보다 쉽게 다른 직장으로 전직할 수 있게 돕는(파견법) 법안”이라는 발언이 그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이들 법안이 통과되면 조선·해운업체 등에서 일자리를 잃게 될 사람들이 “쉽게 다른 직장으로 전직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쌍용자동차나 한진중공업 노조 등의 파업을 기억하고 한 말인지 궁금하다.

이경 선임기자 jae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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