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분석] 부실기업 책임 어떻게 물을까
정치권과 감독당국, 시민사회, 노동계가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한 대주주 책임론을 공통적으로 제기하면서 이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구조조정 대상인 해운사와 조선사들의 난색으로 큰 진전을 보지 못하면서, 대주주 책임에 대한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벽에 부딪친 대주주 책임론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23일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을 방문해 “경영이 잘못되면 시장원리에 의해 기업을 방만하게 운영한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지난달 26일 “대주주는 기업 부실에 상응하는 고통 분담을 채권자, 근로자와 함께 져야 한다. 사재 출연이나 경영권 포기각서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등도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국민과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안긴 재벌 총수와 경영진에 대한 책임 추궁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현대상선의 자율협약을 맺으며 사재 300억원을 출연하고 경영권 포기각서를 썼다. 하지만 현 회장의 사재 출연액은 채권단의 출자전환 예상 규모인 7천억원의 5.7%에 불과해 적절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한진해운의 자율협약을 맺으면서 자구안을 냈지만, 사재 출연 등 고통분담 방안은 제외했다. 한진그룹 고위 임원은 “그룹 전체로 2014년 한진해운 경영권을 인수한 뒤 유상증자, 대여금, 지급보증 등을 통해 이미 8200억원을 지원했다”며 “한진해운 지원금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 그룹 재무구조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룹 정상화에 전력에 쏟아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은 3월 말 기준 931%에 달한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은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해, 채권단 지원을 받는 해운사나 대우조선해양과는 처지가 다르다며 대주주 책임론에 모두 부정적이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최근 대주주인 정몽준 전 의원이 2003년부터 10년간 받아간 배당이 2700억원에 달한다며 대규모 희망퇴직에 상응하는 사재 출연 등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중공업 임원은 이에 대해 “대주주는 회사지분 10.1%를 갖고 있을 뿐 아무런 공식 직함을 맡지 않고 있고, 배당금도 40%를 세금으로 낸 뒤 아산나눔재단과 아산정책연구원에 각각 수백억원씩 기부했다. 회사 주식을 제외하고는 사재 출연을 할 현금이 없다”고 말했다. 삼성도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최근 “삼성중공업 문제에 대해 이재용 부회장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며 대주주 책임론을 제기한 것에 불만이다. 삼성 미래전략실 고위 임원은 “삼성중공업은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어서 대우조선과는 처지가 다르다”고 말했다.
외면당하는 책임론
경영자 책임·고통 분담 명분으로
자율협약 맺은 현대 현정은 회장
출연금 300억, 출자전환액의 4%
한진 조양호 회장은 아예 없어
현대중·삼성중도 책임론에 불만 전문가 해법 3가지
법률적인 책임 분명히 물어라
산 기업이라고 봐줘선 안된다
지원 상응하는 자구노력 필수
■ 대주주 책임론 원칙 세 가지
전문가들이 제기하는 첫째 원칙은 경영실패 과정에서 일어난 위법행위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우선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대주주의 책임 범위를 단순히 고통 분담 차원의 사재 출연에 국한시키지 말고, 위법 행위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엄히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부실 경영으로 쓰러진 에스티엑스(STX), 동양, 웅진의 경우 총수가 모두 배임·횡령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해운과 조선의 경우 이 부분이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 대우조선의 경우 금융감독원이 분식회계 혐의에 대해 회계감리 작업을 진행 중이어서 향후 검찰 고발 가능성이 열려있을 뿐이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의 주식 거래에 대한 수사는 경영 부실 책임과는 별개 사안이다. 현대상선은 현정은 회장과 측근의 전횡과 불법행위 의혹이 다수 제기된 상태다.
둘째는 죽은 기업만 조사하고 살아있는 기업은 봐주는 관행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난 속에서 그룹의 전체 또는 일부가 살아남은 금호와 동부는 총수의 위법 행위 여부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김 소장은 “금호그룹 박삼구 회장의 경우 아시아나항공이 2009년 말 금호산업의 워크아웃 신청 직전 기업어음 790억원어치를 사준 것과 관련해 경제개혁연대가 배임과 부당지원 혐의로 각각 검찰 고발과 공정위 신고를 했으나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고 말했다.
셋째로 채권단 지원을 받거나 다수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의 고통을 겪을 경우 대주주도 자구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진형 더민주당 국민경제상황실 부실장(전 한화투자증권 사장)은 “채권단의 출자전환이나 신규 자금은 아니더라도, 기존 대출금의 만기 연장이나 이자율 유지 등도 분명히 지원이기 때문에 대주주의 상응하는 자구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계열사의 부실 기업 지원은 아시아나항공 사례처럼 부당지원에 해당할 위험성이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중공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금융당국과 채권단이 삼성전자 등 주주계열사에게 지원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혔다. 대주주가 경영권을 포기해도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신광식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는 “대주주에게 사채 출연 등을 강제할 수는 없지만, 국민과 노동자들의 고통을 감안할 때 역시 고통 분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조건부 자율협약이 진행 중인 한진해운이 채무재조정을 위해 자율협약 개시 이후 처음으로 사채권자 집회을 연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 로비에 전시된 선박 모형 옆으로 입주사 관계자가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경영자 책임·고통 분담 명분으로
자율협약 맺은 현대 현정은 회장
출연금 300억, 출자전환액의 4%
한진 조양호 회장은 아예 없어
현대중·삼성중도 책임론에 불만 전문가 해법 3가지
법률적인 책임 분명히 물어라
산 기업이라고 봐줘선 안된다
지원 상응하는 자구노력 필수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대주주 책임 추궁 현황
정부와 금융당국이 당초 제시한 현대상선 용선료 인하 협상 마감일이었던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현대상선 본사의 모습. 현대상선은 25일까지도 용선료 인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 하고 있는 상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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