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열기에 앞서 위원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은행이 또다시 독립성 시비에 휘말렸다. 정부가 요구하는 국책은행 자본확충 펀드에 10조원 규모의 돈을 넣기로 한 탓이다. 더구나 이런 결정이 한은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의 공식 승인도 없이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모든 경제주체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중립적인 시각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중앙은행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통화신용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오래된 숙제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그것이 시작된 이래 주기적인 파국에 시달려왔다. 그중 1825년에 벌어진 공황은 경제사에서 최초의 세계적 차원의 공황, ‘신흥국발’ 공황으로 여겨지곤 한다. 이전 몇년 동안 중남미 투자 붐으로 영국의 금융시장이 한껏 달아올랐고, 이런 곳에는 늘 빠지지 않는 사기와 협잡 속에서 투자에 따른 과실이 좀처럼 실현되지 않자 불안한 투자자들은 은행으로 달려갔다. ‘뱅크런’(bank run)이 시작된 것이다. 런던의 몇몇 주요은행을 포함해 수십 개의 지방은행을 도산시키고 나서, 위기의 불길은 유럽으로 옮겨갔다.
이 와중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이 ‘소방수’로 불려 들어가 위기에 빠진 시중은행들에 과감히 대출을 해줬으나, 개입의 시기가 너무 늦은 탓에 위기를 진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것이 재밌는 것은 당시로서는 영란은행이 아직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은행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영란은행이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노릇을 함으로써 그 ‘공적’ 성격을 과시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이후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에 대한 논의는 1873년 월터 배젓의 ‘롬바드 스트리트’에서 비로소 정립되어 오늘날엔 중앙은행의 기본 역할로 여겨진다.
그러면 이번에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은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10조원의 긴급 수혈을 해주기로 결정한 것도 ‘최종대부자’로서 중앙은행 본연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보통 중앙은행에 의한 긴급 유동성 공급의 대상은 단기적인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금융기관에 한정된다. 지불능력 자체가 없다고 판단되는 금융기관을 살리고자 한다면 중앙은행의 대출보다는 정부의 재정투입에 의존하는 게 보통이다. 다른 한편 중앙은행은 때때로 대형 금융기관에 직접 자본확충을 돕기도 한다. 이 경우 중앙은행을 ‘최종대부자’에 빗대 ‘최종자본’(capital of last resort)이라고 칭한다.
■ 문제 많은 ‘자본확충펀드’에 과감히 참여키로 한 한은
이렇듯 현대 자본주의에서 중앙은행의 역할범위는 점차 확대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2007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다양한 ‘비전통적’ 통화신용정책을 구사하면서 위기를 길들여 나가고 있다.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이러한 정책결정을 위한 별도의 기구를 두고 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나 우리나라의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가 그것이다. 경제상황을 주시하면서 기준금리를 정하는 일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금융기관이 단기 유동성 부족을 겪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불능력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등을 판정하고 지원의 성격을 정하는 것도 결국은 이 기구의 몫이다. 통화신용정책은 고도로 전문적인 분야인데다가 국민경제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이 기구는 독립적이고 중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지난 8일 정부가 발표한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 계획의 적절성은 이런 측면에서도 따져볼 수 있다. 부실기업에 부적절한 대출을 남발해 건전성이 훼손된 국책은행을 돕기 위해 발권력을 동원했다는 것 자체를 나무랄 필요는 없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사정이 절박하다면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고려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다. 문제는 그러한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느냐다. 200년 전의 영란은행이었다면 총재가 정치권의 요청을 받고 ‘최종대부자’로 나설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한국은행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통위를 통해야만 한다. 8일에 정부 차원에서 자본확충펀드 결정이 나고 하루 뒤 열린 금통위에서조차 그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이번 조치가 정당성을 크게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현재 정부가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을 통해 문제가 되는 은행들에 직접 출자하지 않고 한은을 통해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하려는 데는 국회의 동의를 구하는 ‘성가신’ 절차를 피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회의 심의?의결을 거쳐야 하는 사안에 ‘우회로’를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은이 국민의 대의기구인 국회를 무력화하는 도구가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한은이 갖는 독립성 때문이다. 그러나 한은이 그러한 지위를 부여받은 것은 통화신용정책의 전문성과 복잡성 때문이지 결코 국회나 국민 위에 올라서라는 의미는 아니다.
■ 금융통화위원회 인적 구성 방식에서부터 중립성과 독립성 갖춰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9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한국은행은 이날 기준금리를 1년 만에 0.25%포인트 낮춰 사상 최저 수준인 1.25%로 내렸다. 공동취재사진
이렇게 사태가 파행화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일국의 중앙은행을 정권의 도구로 여겨온 우리의 오랜 관행 때문일 것이다. 애초 미국의 연준을 본떠 만들어진 한은이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서 사실상 재무부의 산하기관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한은의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성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35년 뒤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였다.
하지만 독립성과 자율성을 법률에 명시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장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내부의 다양한 의견들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내적 구조’를 확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은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통위의 구성에 대해 재고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금통위의 위원 구성이 경제의 현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미국의 연준과 달리 우리는 한국은행 총재를 포함한 일정 수의 당연직 위원에 더해 몇몇 기관들이 1~2명씩의 위원을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시대가 변하고 경제 구조가 바뀜에 따라 추천 기관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1997년 말에 한국은행법이 전면개정되기 전까지 금통위에는 농림부(또는 농수산부) 장관이 추천하는 위원 1~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제 전체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과 농가 부채의 중요성 등이 고려된 것이다.
농업 쪽의 추천 위원이 빠진 현재의 금통위는 정부와 금융계, 산업계를 대표하는 위원으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우리나라 금융계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변화가 가계부채의 급증이고 일반 국민들이 금융산업의 주요 소비자로 부상했음을 고려하면, 이들을 대표할 만한 위원이 하나쯤은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1200조원을 넘는 가계부채에 대해 그간 한은이 보였던 소극적인 태도도 조금은 달라질 것이고, 금통위 내부에서 좀더 다각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할 만한 것이 금통위원의 임명 문제다. 현재 기관 추천 몫 5명은 대통령의 임명만으로 금통위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임명 이전에 모든 금통위원들이 국회의 인사청문을 거친다면, 적어도 위에서 지적한 ‘국회 무력화’와 같은 사태는 금통위 내부의 메커니즘에 의해 걸러질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이처럼 금통위의 구성과 임명 방식에 약간의 변화만 주더라도 금통위는 좀더 탄탄한 독립성과 민주성을 발휘하리라 여겨진다.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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