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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차값 뺨치는 초프리미엄 가전의 경제학

등록 2016-07-04 09:02수정 2016-07-04 10:49

1000만원 TV, 800만원 냉장고…
초프리미엄이 가전업계 큰 흐름으로
LG전자 4000만원대 TV까지 출시 예정

국내외 업체 디자인·성능 고급화에 사활
혁명적 기술 발전 없지만 업체간 경쟁 가속

초고가 바람 북미·유럽업체들이 선도
국내업체도 별도 브랜드로 도전

“수익보다 브랜드·기술력 과시 목적”
“중국업체들 추격에 고급화 불가피”
먼저 뛴 일본업체들과 경쟁도 큰 숙제

65인치 티브이 1100만원, 정수기 달린 양문형 냉장고 749만원, 용량 21㎏ 드럼세탁기 222만원….

가전제품 몇 가지를 골라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2천만원이 훌쩍 넘었다. 준중형급 자동차 한 대 값이다. 제품마다 살펴보니 편의 기능이 눈에 띄었지만 ‘최첨단 신기술’이라고 부를 만하지는 않았다. 디자인과 음향을 신경 쓴 올레드(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티브이이거나 각종 관리 기능을 강화한 냉장고, 인체공학적 설계를 담은 세탁기 정도였다. 만만찮은 가격표를 단 이들의 정체는 뭘까?

요즘 가전매장에서는 ‘초프리미엄’이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다. 삼성전자·엘지(LG)전자 등 주요 가전업체가 대중적인 티브이·세탁기·냉장고 제품보다 1.5~3배까지 비싼 제품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일반 제품군보다 비싼 프리미엄급조차 훨씬 뛰어넘는 값을 매겨 초프리미엄이라는 ‘언어 인플레’가 불가피해졌다. 이런 제품들은 가전매장 안에서도 판매 공간을 구분하거나, 아예 배달과 애프터서비스를 다른 방식으로 해 ‘특별함’을 강조한다.

가전업계에서 초프리미엄 가전제품을 구분하는 기준은 앞서 밝혔듯 가격을 제외하고는 똑 부러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일본·중국·미국 등의 많은 가전업체들이 경쟁하는 세계 시장에서 티브이,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을 한데 묶은 ‘생활가전’(Home Appliances)의 한 해 매출은 500조원가량이다. 초프리미엄 가전제품은 이 가운데서 소득 상위 5%에 해당하는 이들을 겨냥한 제품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20세기 중반쯤만 해도 텔레비전·냉장고·세탁기 ‘3종 세트’의 보급률은 선진국 진입 여부를 판별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이제는 가전제품 보급률로 선진국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지만, 초프리미엄 가전제품군이 다시 그 기준으로 등장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국내 업체 중 ‘초프리미엄 마케팅’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엘지전자다. 엘지전자는 지난해 말 ‘시그니처’(SIGNATURE)라는 초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었다. 일본 자동차업체 도요타가 렉서스라는 고급 브랜드를 만들고, 현대자동차가 최근 제네시스라는 브랜드를 앞세우기 시작한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당시 “기존의 엘지전자 제품들과 구분을 짓는 통합 브랜드로, 성능과 디자인, 기능을 두루 갖춘 제품에 브랜드를 적용해 안목 높은 고소득층 고객을 공략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조성진 엘지전자 사장은 지난 3월 시그니처 브랜드 발표회에서 “시장에서 팔리는 것이 분명 중요하지만, 시그니처 제품이 하나하나 몇 대가 팔리느냐보다는 엘지의 브랜드를 얼마나 견인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엘지전자가 시그니처 브랜드를 붙인 초프리미엄 제품들을 보면, 우선 미려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출고가가 1100만원인 시그니처 올레드 티브이는 여느 올레드 티브이와 달리 어둡고 밝은 부분을 더 섬세하게 표현하는 기술을 적용하고, 오디오 브랜드인 ‘하만카돈’과 함께 만든 스피커도 적용했다. 850만원에 파는 시그니처 냉장고에는 문을 두 번 두드리면 냉장고 안에 조명이 켜져 유리를 통해 냉장고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을 넣었다. 편의 기능을 강화해 ‘특별하다’고 느끼게 한다는 전략이다.

엘지전자는 하반기에는 한 대 값이 대형 승용차와 맞먹는 초고가 티브이도 내놓는다. 77인치 시그니처 올레드 티브이의 출시를 준비하고 있는데, 지난해 내놓은 77인치 울트라 올레드 티브이(초기 출고가는 4100만원인데 현재 2990만원으로 떨어짐)보다 비싸게 값을 매길 것으로 보인다. 엘지전자 관계자는 “출시 일정이나 가격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4천만원 중반대에서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초프리미엄 마케팅은 조금 다르다. 엘지전자처럼 따로 브랜드를 만들지 않고, 기존 제품군에서 초고가 상품을 강조하는 방식을 꾀하고 있다. 엘지전자처럼 일반 제품보다 1.5~3배 비싼 제품이 대부분이다. 사물인터넷(IoT) 등 첨단 정보기술(IT)을 적용한 점을 특징으로 내세우는 제품도 있다. 749만원에 팔리는 ‘셰프컬렉션’ 냉장고는 탄산수 농도와 냉장고 온도를 미세하게 조절하는 기능을 담았다. 또 689만원인 65인치 퀀텀닷 에스유에이치디(SUHD) 티브이도 일반 유에이치디 제품와 달리 퀀텀닷 기술을 적용하고 빛반사를 줄였다는 점을 내세운다. 해외 가구 디자이너와 협업해 디자인을 강조한 ‘세리프(Serif) 티브이’도 40인치 제품이 199만원인데, 일반 티브이 제품과 견줘 2~3배 정도 비싼 셈이다. 셰리프 티브이는 아예 가전매장이 아닌 고급 가구매장에서 파는 등 판매 전략도 다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단순히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목적보다는 실질적으로 프리미엄 시장을 확대하고자 한다. 실제로 판매 추세를 살펴보면, 주력 판매 모델이 일반형보다는 프리미엄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고가 제품을 중심으로 한 삼성·엘지전자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중소 업체들도 프리미엄 제품군을 확대하고 있다. 동부대우전자는 하반기에 스탠드형 김치냉장고 등 대형 프리미엄 신제품을 내놓기로 했다. 대유위니아도 지난해 프리미엄 가습기 제품을 내놓은 바 있다.

국내 가전업체들의 행보는 세계 시장에서 초프리미엄 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북미·유럽 업체들을 추격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가전업계의 벤츠’로 불리는 독일의 밀레는 세탁기·식기세척기·커피메이커부터 빌트인(붙박이) 가전제품 등 다양한 고가 제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무선청소기와 날개 없는 선풍기 등으로 유명한 영국 다이슨도 초프리미엄 전략을 앞세우는 대표적 업체다. 미국에서는 월풀이 빌트인 가전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며, 제너럴일렉트릭(GE)도 고소득층을 겨냥한 ‘지이 모노그램’ ‘지이 프로파일’이라는 별도 브랜드를 내놓은 바 있다. 이들 업체는 우선 고소득층을 겨냥한 제품을 내놓은 뒤, 브랜드는 같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엔트리 아이템’으로 시장을 넓혀가는 방식을 꾀하고 있다. 엘지전자 관계자는 “지난해 미국에서 프렌치도어(위에 냉장실, 아래에 냉동고가 있는 형식) 냉장고 가운데 3500달러(약 400만원) 넘는 제품의 비중이 2013년 대비 3배 이상 늘었다. 또 미국의 초프리미엄 빌트인 매출액이 약 80억달러(약 9조2천억원) 규모로 전체 시장의 15%다. 일반 빌트인 시장과 비교하면 성장률이 3배 이상 높다”고 설명했다. 가전업체들은 양극화 속에 고급 제품 수요가 늘어나는 국내 부유층과 경제회복으로 주택 시장이 살아나면서 가전 수요도 커진 미국을 초프리미엄 제품군의 주요 시장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국내 가전업체들은 초프리미엄 제품이 당장 실적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한 마케팅 전문가는 “어느 업체도 초프리미엄 제품을 팔아 수익을 높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엘지 시그니처의 경우 광고비용 부담도 크다. 결국 ‘우리도 이런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기술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다른 업체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마케팅 측면이 강한 게 사실이다. (수익과 마케팅 효과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란 어렵다”고 평가했다. 가전 시장에서 ‘우린 수준이 다른 업체야’라는 인상을 각인시키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는 뜻이다. 시그니처 제품군을 내놓은 지 넉 달이 넘은 엘지전자는 구체적인 판매량은 밝히지 않고 “예상 판매량보다 2배 이상 팔리고 있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초프리미엄 가전제품의 잇단 등장은 시장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해석도 있다. 급성장한 중국 가전업체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국내 업체들의 경쟁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성진 엘지전자 사장은 지난해 “중국 업체들은 브랜드 파워가 아직 떨어지지만 제품 면에서는 95%까지 따라왔다”고 말한 바 있다. 세계 가전시장은 ‘가전 굴기(몸을 일으킴)’라고 부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 업체들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저가 제품군을 장악해온 중국의 하이얼과 메이디는 어느새 세계 상위권 가전업체로 성장했다. 일본 산요를 인수한 하이얼은 지난 1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의 가전부문도 54억달러(약 6조2천억원)에 사들였다. 메이디도 지난달 도시바 가전사업 자회사인 도시바라이프스타일의 지분 80%를 인수하고, 앞으로 40년 동안 도시바의 이름을 쓰면서 냉장고·세탁기·청소기 등을 판다. 메이디는 이탈리아 에어컨 제조업체 클리베도 최근 인수하는 등 몸집 불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 업체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티브이 시장에서도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들이 중저가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까 국내 가전업체들은 결국 밀레·월풀 같은 서구 브랜드와의 경쟁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움직임과 관련해 눈에 띄는 게 일본 업체들의 행보다. 산요, 샤프, 도시바 등 과거 일본 전자산업을 이끌었던 업체들은 이미 중국 업체들이 인수했다. 남아 있는 ‘순수’ 일본 업체인 소니와 파나소닉은 제품군을 줄이고 초프리미엄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권세훈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가전산업의 한·중·일 국제경쟁력 비교 및 정책 제언’ 보고서에서 “소니는 티브이 제품군 가운데 40인치형 미만 모델을 줄이고 대형 기종에 주력하고 있다. 기존의 판매 대수를 중시하는 보급형 티브이를 포기하고, 세계시장 점유율 경쟁에서 철수하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권 교수는 “일본 기업들이 최근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친 뒤 원래 보유하고 있던 원천기술과 첨단기술 경쟁력으로 재무장하고, 중국 기업들은 빠른 속도로 기술력을 향상해 한국을 근접 추격하면서 한국 제조업이 다시 호두까기 기계인 ‘넛크래커’ 속에 끼인 호두가 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중국 업체들의 추격에 대한 해법으로 떠오른 초프리미엄 가전 전략은 기술 발전뿐 아니라 시장이 그에 맞게 형성되고, 이 시장에서 계속 우위를 지켜갈 수 있느냐도 성패를 가를 중요한 요소다. 한 국내 가전업체 관계자는 “최근 국내 가전업체의 초프리미엄 전략을 보면 10여년 전 한국 업체의 추격을 받던 소니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당시 소니가 초프리미엄 제품을 계속 내놓다가 삼성전자 등에 기술력을 따라잡혔다. 중국도 1~2년이면 우리를 따라오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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