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선 납품업체와의 공정거래와 상생협력은 필수입니다.”
정재찬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이 지난달 15일 이마트·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대표들과 만나 대형 유통업체의 불공정행위 근절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6월30일에는 롯데·신세계·현대 등 백화점 대표들과 만나 판매수수료·인테리어 비용 부담 완화 등이 담긴 백화점과 납품업체 간 거래관행 개선 방안도 발표했다.
하지만 정 위원장은 백화점 대표들과 만나기 직전인 6월24일 불공정행위를 저지른 대형 유통업체들에 부과하는 과징금 최고한도를 대폭 낮추는 내용으로 ‘대규모유통업법’ 고시를 개정하고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는 공정위의 유통업계 불공정행위 근절 의지를 의심케 만드는 것은 물론 2011년 여·야와 공정위가 백화점·대형마트 등의 ‘갑질’ 근절을 위해 ‘대규모 유통업법’을 새로 제정하고, 다른 법에 비해 과징금을 무겁게 부과하기로 합의한 것을 정면으로 뒤집는 행위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정 위원장은 법 제정 당시 공정위 부위원장 신분으로 국회에 출석해 대형 유통업체의 갑질에 대한 과징금 강화에 찬성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3일 공정위 설명을 들어보면, 개정 고시의 주요 내용은 대형 유통업체들이 중소 납품업체들을 상대로 부당 반품, 판촉비 부당 전가 등의 불공정행위를 한 경우 부과하는 과징금의 최고 한도를 기존 ‘전체 납품대금’에서 ‘관련 법위반 금액’으로 완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화점·대형마트 등이 같은 ‘갑질’을 하더라도 과징금이 대폭 줄어든다. 일례로 공정위는 2014년 홈쇼핑업체인 씨제이오쇼핑에 대해 판촉비 부당 전가와 계약서 미교부 등을 이유로 46억여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 중에서 과징금 부과 비중이 가장 큰 혐의는 판촉비 부당 전가로 85%(39억5천만원)를 차지했다. 당시 공정위는 납품대금(493억여원)에 부과기준율 최소치인 20%를 적용해 ‘부과 기초금액’ 99억원을 산정한 다음 과징금이 지나치게 많다며 60%의 감경률을 적용해 최종 과징금을 결정했다. 하지만 개정 고시를 적용하면 법위반금액(판촉비 부당전가액 28억여원)에 부과기준율 50%(개정 고시 내용 반영)를 적용하면 ‘부과 기초금액’이 14억원으로 줄고, 그때처럼 감경률 60%를 적용하면 최종 과징금은 2014년 부과액의 7분의 1에 불과한 5억6천만원으로 축소된다. 공정위가 “고시 개정으로 과징금 기준이 관련 납품대금 대신 법위반금액으로 바뀌었지만 부과기준율이 종전의 20~60%에서 30~70%로 높아졌기 때문에 과징금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개정 고시는 2011년 11월 대규모유통업법 제정 당시 여야와 공정위의 합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지적이 많다. 과징금 한도는 법 제정 당시부터 쟁점이었다. 한나라당 이사철 의원은 기존 공정거래법 고시와 똑같이 ‘관련 매출액의 2%’로 하자고 주장한 반면 민주통합당 박선숙 의원은 전체 납품대금의 2배로 하자고 맞섰다. 여야와 공정위는 오랜 협의 끝에 과징금 최고한도를 ‘전체 납품금액의 1배’로 하는 절충안에 합의했다.
당시 부위원장 신분이었던 정재찬 위원장은 국회에 직접 참석해 이 방안에 찬성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2011년 8월25일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 회의록을 보면, 정 위원장은 과징금 최고한도를 납품대금의 1배로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한꺼번에 충격을 주는 것보다는 실현 가능한 쪽으로 해서 운용을 해 보고, 만약 문제가 있다면 법을 그때 또 개정하면 된다”고 발언했다. 공정위가 고시 개정 이유에 대해 “과징금 부과 한도가 공정거래법상 불공정행위의 경우 관련 매출액의 2%인 반면 대규모 유통업법은 관련 납품대금의 1배(100%)까지로 높게 설정되어 있어 제재 수준과 법위반 정도와의 상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은 정 위원장의 발언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당시 법 개정 과정을 지켜본 지철호 전 공정위 상임위원(중소기업중앙회 자문위원)은 “대규모 유통업법 상 과징금 최고 한도가 공정거래 분야의 다른 법에 비해 무거운 것은 그만큼 중소 납품업체들의 피해가 심각하고, 대형 유통업체들의 관행화된 갑질을 근절시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여야와 공정위의 인식이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5년 사이에 과징금 최고 한도를 낮출 만큼 대형 유통업체들의 갑질이 근절됐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대형 백화점에 유명 가죽브랜드 제품을 납품하는 한 중소기업 사장은 “공정위가 대형 유통업체들의 갑질 근절을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제(피해액의 3배를 배상하는 제도)를 도입하지는 못할망정 과징금 부담을 대폭 낮춘 것을 보니 공정위와 유통업체가 한통속이라는 중소기업들의 불만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며 “백화점·대형마트 등이 갑질을 해서 얻는 부당이득이 과징금보다 크다면 누가 갑질을 그만두겠느냐”고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