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예산정책처 누리집에 들어가면 ‘국가채무시계’라는 게 있다. 예산정책처가 지난 2013년 9월 만든 이 시계는 국가채무 액수(전망치)를 3초마다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올해는 확정예산을 기준으로 1초당 약 158만원씩 늘어나 전체 국가채무가 8월17일 오후 1시45분29초 현재의 경우 626조4225억8445만4963원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 1인당 1233만812원꼴이니 나랏빚이 적지 않은 셈이다.
여기서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비교적 일찍 극복한 것은 국가채무 수준이 낮은 게 한몫을 했다. 재정 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재벌그룹 등 민간의 부실 채무를 상당부분 인수해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월22일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 10일 입법예고에 들어간 재정건전화법안은 그런 면에서 바람직해 보일 수도 있다. “재정의 중장기적인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 재정건전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를 표방하고 있어서다. 무엇보다 국가채무와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정수준 이내로 유지·관리하고, 페이고(pay-go) 제도를 강화하겠다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재정건전화법안에는 문제가 많다.
우선 국가채무 한도를 국내총생산 대비 45% 이내로, 관리재정수지 적자 폭을 3% 이내로 묶겠다고 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명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특히 … 유럽연합(EU) 및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의 재정준칙 운용 현황을 참고했으며”, “인구구조 고령화 및 복지지출 증가 추세, 통일·대외경제 여건 등 우리나라의 특수성도 반영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 정도 설명을 듣고 45%와 3% 수치 설정이 적절하다고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유럽연합의 경우 채무한도(60% 이내)가 우리나라의 재정건전화법안보다 높고, 이 한도마저 세계금융위기 이후 비판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채무한도 등이 회원국들로 하여금 긴축정책을 펴게 만들어 경기회복을 더디게 하고 이것이 다시 채무 비율을 높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서 45%와 3% 한도가 도입되면 재정이 적극적인 구실을 하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재정의 이런 구실은 유럽연합 대다수 국가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필요하다고 본다. 소득을 비롯한 각종 불평등현상이 심각한 반면, 이를 줄일 정책 등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이고 기조가 강해지면 복지 확충 등은 어려워지게 된다. 재원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수 없어서다.
또한 재정건전화법안에는 세수를 확충해 재정건전성을 높이겠다는 구상 자체가 없어 문제다. 정부는 “장기재정 전망 결과 현 제도가 지속될 경우 재정의 장기적 지속가능성에 문제가 있음을 확인했다”며 이런저런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재정지출의 증가율을 억제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불요불급한 재정 지출 줄이기를 넘어 전반적인 재정 증가율 축소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사실 정부가 세수 확대 방안에 의지가 없는 것은 얼마전 내놓은 ‘2016년 세법개정안’에서 이미 확인됐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치에 많이 못미친다는 현실 등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법안을 만들면서 정부가 두루 의견을 들었는지 궁금하다. 정부는 공개토론회를 여는 등 국내외 전문가를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의견 수렴을 거쳤다고 밝혔다. 문제는 재정 적극론자들이 이 과정에 얼마나 참여했느냐인데 비율이 높은 것 같지 않다. 그랬다면 재정건전화법안이 이렇게 일방적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법안 취지와 내용에 공감할 대목도 있다. 구조적 저성장 추세와 생산가능인구 감소 등 재정 환경의 추세적 변화에 대응해 재정운용의 새로운 틀을 마련해야 하며, 기존 재정운용 제도로는 재정 총량의 실효적 관리가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그것이다. 재정 정보와 통계를 공개해 국민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것 등도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재정건전화법안은 이득보다 손실이 훨씬 커 보인다. 나라경제와 국민생활에 끼칠 영향이 가볍지 않은 만큼 국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이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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