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원만 더 넣어 주세요.”
시중은행에 다니는 권아무개(32)씨는 최근 친척이나 친구, 지점 인근 상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게 일이 됐다. 지난 3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출시 당시 은행들이 직원들에게 많게는 100명 이상씩 가입자를 유치하라며 할당량까지 내렸을 때 ‘1만원 계좌’ 가입자로 끌어모았던 이들이다.
권씨는 “금융당국에서 소액 계좌가 많다는 지적이 나오자 1만원 이하 계좌 비중을 줄이라는 지시가 새로 내려왔다”며 “신규 가입이 줄어든 상태에서 소액 계좌 비중을 줄이려면 염치가 없어도 이미 가입한 이들에게 1만원만 계좌에 더 넣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17일 금융권의 설명을 들어보면, 아이에스에이 경쟁 과열로 소액 계좌를 양산한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지만 은행들은 여전히 ‘눈 가리고 아웅’ 식 대응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시 초기엔 실적 압박에 시달린 은행원들이 창구를 찾은 소비자들에게 “가입만 해 달라”며 부탁하거나, 자기 주머니를 털어 돈을 내주면서까지 가입자를 유치해 ‘깡통 계좌’만 늘린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양산된 1만원 계좌 비중을 줄이기 위해 계좌 잔액을 1만원 이상으로 만들라고 직원들을 다시 압박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엔 소액 계좌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데다 금융당국이 거듭 과당경쟁 자제를 주문하고 나선 최근 분위기가 작용했다. 금융위원회 자료를 보면, 은행에서 개설된 아이에스에이 가운데 1만원 이하 계좌는 지난 3월 81.1%에 달했다. 6월에는 이 비중이 60.2%까지 줄었지만 여전히 1만원이 채 안 되는 계좌가 많다.
이에 진웅섭 금융감독원 원장은 지난달 21일에도 은행 준법감시인들과 간담회를 열어 “은행 직원들의 과도한 실적 부담과 불완전판매로 인해 소비자 피해 등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강조하며 거듭 경고 신호를 보냈다.
문제는 이런 자제령이 영업현장에서 ‘1만원 추가 납입’이란 편법 대응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시중은행은 간담회 이후 본점에서 ‘정도영업’을 하라며 각 지점에 공문을 내렸다. 하지만 지역 영업본부를 통해서는 “(정도영업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1만원 이하 계좌를 줄이라”는 구두 지시가 따로 내려왔다. 이 은행에 다니는 창구 직원은 “지점별로 소액 계좌 비중이 비교되니 지점장들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정도를 강조하지만 실제 지시는 영업 현장에서의 편법만 부추기는 셈”이라고 밝혔다.
이런 처방은 결국 소비자들의 우려만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아이에스에이에 가입한 박아무개(33)씨는 “은행원이 부탁해 상품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계좌를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추가 입금도 부탁받았다”며 “큰돈은 아니지만 찜찜함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은행권의 아이에스에이 유치 경쟁은 수익률을 높여 소비자들이 찾아오게 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며 “실제 가입 의사를 가진 이들에게 유인 혜택을 크게 주지 못 하면서 명의만 빌리는 형태의 사실상의 불완전 판매만 늘면 은행들로서도 장기적으로는 신뢰상실로 인한 손해가 더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승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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